1920년 3월 9일자 창간 기념호

1920년 3월 5일 간행된 조선일보 창간호는 현재 일부 지면만 전해진다. 3월 7일자로 낸 제2호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3월 9일 발행된 제3호가 현재 온전히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조선일보다.
4면을 발행했으며 조선의 동전 그림들을 바탕으로 깐 2단 통단 컷을 지면 상당으로 올리고 ‘창간기념호(創刊紀念號)’라고 장식했다. 1면 머릿기사는 토착산업의 몰락을 개탄하는 ‘실업(實業)의 실지(實地)’라는 논설이고, 그 아래 창간호부터 연재된 ‘동양 고대와 해상교통’ 제3편을 게재했다. 1면의 면머리에 있는 발행년월일 ‘대정(大正) 9년 3월 9일’에서 ‘정(正)’자가 거꾸로 인쇄돼 있다. 창간호 3면 상단의 ‘대정’ 연호도 마찬가지로 ‘정’자가 뒤집어져 있다. 창간 초기에 연달아 발생한 ‘오식’은 편집진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1920년 8월 15일자 100호 기념호

창간 이후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일보는 8월 15일자로 100호를 발간했다. 하지만 감격스러운 백일잔치를 해야 할 8월 14일 사장 조진태가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퇴임을 결정하는 바람에 100호 특집호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8월 15일자 신문에서 1면 사고를 통해 “우리 민족은 소장노년을 물론하고 본보를 만수무강하라고 성심으로 축하하는 줄 스스로 알고 있다”며 “본사 사정으로 100호 특집호를 제때 못내는 대신 독자들의 축사 등을 투고받아서 8월 24일에 지령 100호 특집호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약속대로 8월 24일 발행된 100호 기념호는 평소보다 2배로 늘어난 8면으로 화려하게 편집해서 제작됐다. 1면에는 활짝핀 나리꽃 두 송이가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을 광고없이 전면에 깔고 순한문으로 된 기념사와 각계 인사들이 보내온 축사를 실었다.

1920년 8월 24일자 100호 기념호

창간 이후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일보는 8월 15일자로 100호를 발간했다. 하지만 감격스러운 백일잔치를 해야 할 8월 14일 사장 조진태가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퇴임을 결정하는 바람에 100호 특집호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8월 15일자 신문에서 1면 사고를 통해 “우리 민족은 소장노년을 물론하고 본보를 만수무강하라고 성심으로 축하하는 줄 스스로 알고 있다”며 “본사 사정으로 100호 특집호를 제때 못내는 대신 독자들의 축사 등을 투고받아서 8월 24일에 지령 100호 특집호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약속대로 8월 24일 발행된 100호 기념호는 평소보다 2배로 늘어난 8면으로 화려하게 편집해서 제작됐다. 1면에는 활짝핀 나리꽃 두 송이가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을 광고없이 전면에 깔고 순한문으로 된 기념사와 각계 인사들이 보내온 축사를 실었다.

1923년 6월 6일자 1000호 기념호

일제를 비판하는 사설과 기사를 실어 정간당하는 등 고초를 겪으면서도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문화-스포츠 행사를 후원하는 등 신문사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조선일보는 1923년 6월 6일 1000호를 맞았다.
24면으로 발행된 1000호 기념호는 1면 상단에 통단으로 ‘호령일천(號齡一千)’이란 컷을 올리고 기념 논설과 독자들이 기고한 축하의 글을 실었다. 또 조선일보 창간일인 1920년 3월 5일에 태어난 어린이 3명의 사진을 실었고, 하단에는 김병로-허헌 등 민족 변호사들을 비롯해 각계 인사들의 축하 광고가 게재됐다. 이날 조선일보는 본지와 함께 4면씩 5묶음으로 된 특별부록을 제작해 함께 배포했다. 부록에는 당시 120만 동포가 생활하고 있던 만주의 생활상을 담은 ‘만주판’, 창간호부터 1000호까지 주요 기사 1000건의 목록을 담은 ‘천호일람’ 등이 들어 있었다.

1924년 11월 1일자 혁신기념호

조선일보는 1924년 9월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민족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됐다. 경기도 의정부의 대지주였던 신석우는 민족지도자 이상재 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주필 안재홍, 편집국장 민태원으로 새 진용을 짜서 의욕적으로 재출발했다. 그리고 1924년 10월 3일 ‘조선일보’라는 제호 디자인을 바꾸고 지면 배치를 새로 하는 등 혁신호를 발행하여 전국에 10만부를 무료로 배포했다.
이날 1면 왼쪽 아래에 신설된 ‘팔면봉(八面鋒)’이란 촌평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어 11월 1일 12면으로 임시증면하여 다시 한번 ‘혁신기념호’를 발행했다. 1면 상단에 파도가 넘실대는 그림 위에 ‘혁’ ‘신’ ‘기’ ‘념’이란 네 글자를 배치했고, 그 아래 ‘조선일보의 신(新)사명-천하민중에게 신명(申明)함’이란 특별사설을 실었다.

1929년 5월 19일자 3000

조선일보는 1929년 5월 19일 고대하던 3000호를 발행했다. 하지만 당시는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전세계가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념사설만 실었을 뿐 특집이나 행사를 갖지는 못했다.
1면 머리에 실린 ‘삼천호 되는 본보(本報)’라는 기념사설은 “신문으로서 삼천의 호령(號齡)을 거듭한 것은 십년에 걸쳐서 언론봉공의 지속을 설명함”이라고 창간 이후의 활동을 자부하면서도 “오인(吾人)으로 하야금 과거행적을 자명(自鳴)하는 한가를 가지는 것은 무용하며 엄숙한 자기반성과 자기책려(策勵)의 아래 일층 더 각층의 각 방면에의 의식적 적극진출을 일관케 하자”며, 민족언론으로서의 사명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했다.

1932년 11월 23일자 속간호

조선일보는 사주이면서 1927년 3월 사장에 취임했던 신석우가 1931년 5월 자리에서 물러나고 뒤이어 사장이 됐던 안재홍마저 1932년 3월 구속된 후 일제의 강요로 사표를 제출하면서 경영 공백 상태에 빠졌다.
이를 우려한 민족운동가 조병옥과 주요한은 발행권을 인수하기로 하고 민족지도자 조만식을 새로운 사장으로 영입했다. 1932년 11월 23일 발행된 조선일보 속간호는 1면 상단에 ‘속간사-본보의 사명을 재인식하자’를 무늬를 두룬 박스로 싸서 실었다.
이 특별사설은 “이천만 민중의 공기(公器)로서 본보는 죽어도 이천만 민중과 같이하고 살아도 이천만 민중과 같이할 것”을 다짐했다. 이어 1면 중앙에 ‘속간 기념 4대 사업’이란 사고를 실어 ‘조석간 간행, 지면의 개신(改新), 특파원 파견, 기념행운권 발행’을 통해 ‘부활하는 조선일보’ 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1933년 4월 26일자 중흥 혁신호

조선일보의 혼란을 간신히 수습한 조만식과 조병옥 등은 경영을 반석에 올려놓을 새로운 사주를 찾기 시작했다. 조만식과 동향인 평안도 출신으로 금광 사업에 성공해 재력가로 떠오른 방응모가 적임자로 꼽혔다.
조만식 등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방응모는 금광을 처분한 돈으로1933년 3월 22일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이어 장기 휴간에 들어가 사옥을 옮기는 등 새 출발을 위한 준비를 끝낸 후 4월 26일 ‘혁신기념호’ 100만부를 발행해 전국 방방곡곡에 무료로 배포했다. 조선일보의 중흥을 선언한 이 신문은 1면 상단에 실린 ‘혁신의 사(辭)’를 통해 “조선일보의 사명은 항구불변이며 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다”며 “조선일보는 조선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벗”이라고 선언했다. 또 그 뒤에 이어진 사장 조만식과 부사장 방응모의 이름으로 된 ‘취임에 임(臨)하여’를 통해 “본보의 발전은 오직 제위(諸位)의 후원에 있는 바이니 배전의 편달 애호가 있기를 간망(懇望)한다”고 밝혔다.

1935년 4월 28일자 5000

조선일보는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태평로에 웅장한 5층 사옥을 신축하고 문자보급운동을 주도하고 언론사 최초로 항공취재를 위한 전용 비행기를 도입하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이런 밝은 분위기는 1935년 4월 28일 5000호 발간을 맞아 1면 상단에 게재된 ‘지령오천호’라는 특별사설의 “본지가 재작년 4월 28일 혁신호를 발행한 이래 승승장구의 세(勢)로 대내외로 분투노력을 계속함은 오로지 이 신문의 사명을 다하려 함에 있다”는 부분에서도 느껴진다.

1955년 3월 23일자 10000

조선일보는 1955년 3월 23일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10000호를 발행했다. 10000호 특집 조선일보는 색깔이 훨씬 흰 외국산 용지로 제작해 평소 신문의 2배인 8면으로 증면됐다. 1면 윗부분에는 4단 크기로 전단에 걸쳐 김용진 화백이 그린 ‘모란도’ 축화(祝畵)가 실렸고, 그 아래 ‘지령 일만 호의 본보/조국통일의 사명 통감’이라는 머리기사가 게재됐다.
발행인 겸 편집인 방일영은 기념사에서 “1만호를 내기까지 사원들과 독자들의 힘이 컸다”고 술회했다. 그 왼쪽에 실린 기념사설은 “순조로이 나왔다고 하면 연중무휴로 쳐서 35년에 1만2783호가 나와야 할 것인데 겨우 1만호를 산(算)하게 됐다”면서 “기구한 우리 겨레의 운명과 함께 본보 자체도 형극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일제 강점기에 정간과 휴간이 되풀이됐으며 1940년 8월 10일 6923호를 발간하고 강제폐간돼 1945년 11월 23일 복간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온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1986년 4월 4일자 20000

이날 조선일보는 평소보다 2배 많은 24면을 발행해 이중 14면을 20000호 특집기사로 채우는 파격적인 편집을 선보였다. 1면에 실린 방우영 사장의 ‘감사와 반성과 다짐’이라는 기념사는 “조선일보는 무엇보다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봉사하려고 힘써 왔다”고 조선일보의 지난날을 돌아봤다. 그 아래는 지령 20000호를 기념하여 ‘현대사연구소에 10억 출연’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건립’ ‘독립기념관에 ‘추념의 숲’ 조성’의 3대 사업을 전개한다는 사고가 실렸다. 3면에는 최석채 전 조선일보 주필의 ‘민족언론의 나아갈 길’ 특별기고가 게재됐다. 이어 ‘조선일보의 연재소설, 문화-여성 기사’(6-7면), 김기창 화백의 축화(祝畵) ‘태양을 품은 새’와 서예가 김응현씨의 축하 휘호 ‘민족제일(民族第一)’(13면), 조선일보 역사(14면)와 주요 캠페인(17면), 조선일보를 만든 사람들(18면), 조선일보가 만든 ‘한국 언론 최초’ 기록들(21면) 등이 지면을 메웠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