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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를 이끈 사람들

“동아일보와 싸우지 말라”
이상재 1850~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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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한 신석우는 이상재의 집을 찾았다. 그는 경영진과 지면을 대폭 쇄신해 조선일보를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각오를 밝히고 이상재에게 사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상재는 선뜻 수락하지 않았다.

“나는 칠순이 훨씬 넘은 늙은이일세. 나 같은 퇴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더 젊고 훌륭한 인물들이 많으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게.”

신석우는 민족의 장래와 신문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다시 한 번 간곡히 호소했다. 이상재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동아일보와 서로 경쟁하지 말고 합심하여 민족의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사장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상재는 ‘조선 민중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민족지도자였다. 그는 좌우 양쪽 모두로부터 ‘민족의 사표(師表)’로 인정받았다.

1925년 4월 서울에서 최초의 기자대회가 열렸다. ‘전조선기자대회’는 조선인 기자단체인 무명회가 발기했다. 이 대회에는 20여 종의 신문 잡지사 기자 463명이 참가했다.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는 구호 아래 대회는 4월 15일부터 3일 간 진행됐다.

그런데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누구든 사회를 보기 위해 단상에 올라가기만 하면 사회주의 성향의 기자들이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경찰의 시선을 기자대회 쪽으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회의를 지연시키려고 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야유와 이를 말리는 주최 측의 맞고함으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됐다. 누가 단상에 올라가도 사회를 보지 못하고 끌려 내려오는 형편이었다.

이때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가 회의장에 들어섰다. 주최 측은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상재는 회의장의 소란한 모습을 보고 돌아 나오려다 주최 측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단상에 올라섰다. 그가 단상에 올라선 뒤에도 한동안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은 고함을 지르고 의자를 집어던지며 계속 소란을 피웠다.

잠시 사태를 살핀 이상재는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의 유별난 행동에 장내는 일순 조용해졌다.

“여러분이 떠드는 것을 보니 참으로 웃음을 참기가 어렵소.”

이상재는 가장 심하게 소란을 피우던 사람을 사찰로 임명해 장내 분위기를 정돈시킨 뒤 일사천리로 회의를 이끌었다. 이상재의 사회 솜씨는 정평이 나 있었지만 사람들은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 법)이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상재는 날마다 사장실에 출근하지는 않았다. 일이 있을 때 잠깐씩 나타나 중역들과 얘기를 나눈 뒤 사라지곤 했다. 이상재가 이따금 얼굴을 내밀면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모두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그럴 때면 으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어서 일들 하게” 하며 손을 흔들어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신석우는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 경영과 지면을 대대적으로 혁신했다. 그러나 경영난은 여전했다. 사원들의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일부 공무국 직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간부들이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이상재가 나서서 한 마디 했다.

“밥 한 끼 못 먹어 죽는 일 없다. 그러나 신문은 하루도 쉬어선 안 된다.”

이 말 한마디에 직원들은 파업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이상재의 추상같은 권위는 그의 올곧으면서도 희생적인 삶의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느 해 추석이었다. 이상재가 편집국에 들어와 “자네들 송기떡(송편)이나 먹었나?” 하고 물었다. 기자들은 “월급이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상재는 사장실에 들어가 간부들에게도 “자네들 송기떡 먹었나?” 하고 물었다. “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이상재의 입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직원들은 월급을 못 받아 끼니도 못 이을 지경인데 어찌 간부들만 송기떡을 먹느냐는 질책이었다.

이상재는 일선 기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다. 어느 날 사회부 기자 유광렬이 길에서 우연히 이상재와 마주쳤다. 이상재는 “너 돈 있니?” 하더니 “점심을 사내라”고 했다. 유광렬이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털어 점심을 대접했다. 얼마 후 유광렬이 다시 거리에서 이상재를 만나 “선생님, 점심 사드려요?” 하자 “이놈아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 번번이 점심을 사 준다고 그러게!” 하고 웃었다.

1926년 봄이었다. 이상재는 손자 이홍직의 배재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이홍직은 1930년 조선일보에 공채 1기로 입사해 기자로 활동하게 되는 인물이다. 졸업식에선 총독과 경기도지사의 축사를 두 조선인 관리가 유창한 일본말로 대독했다. 마지막으로 이상재에게 축사를 청했다. 단상에 올라간 이상재는 “여러분, 조선말 들을 줄 아시우? 나는 일본말을 몰라 조선말로 한마디 하겠소”라고 했다. 장내는 웃음의 도가니로 변했고 앞서 일본말로 축사를 대독한 관리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이상재는 신간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됐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체이다. 이상재는 노환으로 자리에 누워 신간회 창립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상재는 극구 사양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조선일보 부사장 신석우가 대표로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이상재는 노환을 이유로 회장 취임을 사양했지만 겨레를 위하는 일이라는 신석우의 설득에 다시 한 번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27년 줄곧 병석에 누워 있던 이상재는 3월 25일 조선일보 사장에서 물러났다. 수차 밝혔던 사임 의사가 조선일보 간부들의 만류로 번번이 반려되다가 끝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는 조선일보를 사임한 지 나흘 뒤인 3월 29일 7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전날 후배들의 손을 잡고 “나는 가오. 일 많이 하오”라고 남긴 한 마디가 유언이 되었다.

독립협회 시절 이상재의 동지였던 서재필은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애도했다.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도 “온 천하의 동포와 함께 나는 이상재 선생의 별세하심에 대하야 충심으로 조의를 표하오며 선생의 종료하지 못하신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여러분과 함께 일치협력함을 갱신하려 하나이다”는 조전을 보내 왔다.

조선일보는 3월 30일자 석간부터 장례식인 4월 7일까지 9회에 걸쳐 <월남 선생 사회장의>라는 기사를 연재했다. 사설과 시평을 통해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동아일보도 세 차례의 사설을 통해 이상재의 삶과 업적을 추모했다.

장례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장의위원장은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윤치호가 맡았다. 당시 경성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0만 인파가 장례식에 몰려 나와 운구가 지나는 종로에서 경성역까지 긴 애도행렬을 이뤘다. 영결식이 진행된 경성역에서 고인의 선산인 충남 한산으로 유해가 운구되는 700리 연도에는 120여 단체와 2만여 명의 조객들이 나와 이상재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며 애도했다. 3.1 운동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것이었다.

한산으로 향하던 그의 영구가 군산에 이르렀을 때는 현지 차부들이 조의를 표해 자진 휴업을 하고 조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보도했다. 장의 행렬에 동행했던 사회부 기자 김동환은 영구차 뒤에서 슬퍼만 하다가 기사를 제대로 못 써 편집국장한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이상재는 한산 선산에 안치됐다가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됐다. 비문은 생전의 이상재에게 남다른 사랑을 받은 시인 변영로가 썼다.

조선일보에 전재산 쏟아 부은 독립운동가
신석우 1894~1953
사진1924년 조선일보를 인수해 사장을 지낸 신석우(가운데)가 독립운동가 신채호(왼쪽), 신규식(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1924년 초 신석우는 국내에 남기로 결심했다. 중국에서 일본 관헌에 체포돼 조선으로 압송된 후 옥고를 치르고 나온 직후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을 지냈고 ‘대한’이라는 국호를 제안한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몸져누운 뒤 끝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출옥하자 백발의 노인이 된 아버지 신태휴는 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만 집에 있어라. 조선에서 무슨 사업을 하든지 자금은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마.”

신태휴는 구한말 한성부의 경찰사무를 총괄하는 경무사를 지낸 전직 고위관료로 의정부의 대지주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국내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는 아들의 표정에서 별다른 심경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한 마디 덧붙였다. “네 어미가 그렇게 눈을 감았건만 나도 이젠 늙었다. 네가 또 해외로 나가면 생전에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게다.”

신석우는 당초 구미(歐美) 지역으로 나가 다시 독립운동을 할 작정이었지만 부친의 마지막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훗날 이렇게 밝혔다.

“어떤 사람이나 부자간 정의가 친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우리 부자는 여타 유별하여 나의 부친은 엄부(嚴父)라기보다 자부(慈父)요, 동지라면 가장 가까운 동지인 중 연만하신 터에 그처럼 간절 정중하신 말씀을 하니 아무리 ‘위천하자 불고가사(爲天下者 不顧家事, 천하에 뜻을 둔 자는 집안일을 돌아보지 않는다)’란 말이 있지만 나의 마음이 어찌 감동되지 않았으랴.”( 《개벽》 1934년 12월호)

신석우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뿌리치지 못하고 국내에서 일을 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이때 주위 사람들이 조선일보 인수를 권유했다. 당시 송병준이 판권을 갖고 있던 조선일보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그에게 조선일보 인수를 권유한 사람은 나중에 영업국장을 맡게 되는 홍증식, 공장장에 임명된 최선익, 편집고문으로 지면 혁신을 주도하는 이상협 등으로 짐작된다.

1924년 9월 신석우는 30세의 나이로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경영권을 사는데 들인 돈은 8만 5000원으로 당시 쌀 4300가마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과 재산을 모두 쏟아부었다.

신석우는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기치 아래 경영진의 면모를 일신했다. 민족의 사표로 추앙받던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에 취임했다. 언론인 김동성과 백관수, 개성의 부호 최선익, 전남 영광의 대지주 조설현, 호남 갑부 신구범 등으로 이사진을 구성했다. 편집진도 새롭게 정비했다. 동아일보 창간 주역으로 ‘신문의 귀재’로 불리던 이상협을 편집고문에 앉히고 주필에 안재홍, 편집국장에는 민태원을 포진시켰다. 지면을 대폭 쇄신하고 석간 4면 체제에서 하루 두 번 6면을 발행하는 조석간제를 실시했다. 이른바 ‘혁신 조선일보’ 시대의 막이 올랐다.

재정은 여전히 힘겨웠다. 신석우는 뒷날 여러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곤란했던 일은 역시 돈 문제였다”고 털어놓았다. 종이는 그날그날 겨우 조달하는 형편이었다. 발행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종이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사원들은 사장의 얼굴만 쳐다보고, 사장은 종이 구하러 나간 영업국장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는 그야말로 과붓집 대돈변(돈 한 냥에 대해 매달 한 돈씩 느는 고리 대급)이나 상감님의 망건 값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얻어 쓰게 되고 공장 사람들의 월급을 주지 못하여 동맹파업을 하느니 어쩌느니 하고 야단을 할 때에는 역시 여간한 곤란이 아니었다.”(《개벽》 1934년 12월호)

신석우는 훗날 “조선의 신문이란 돈 잡아먹는 불가사리와 같아서 누구나 섣부르게 덤비지 못할 것이요, 신문사 사장이란 욕과 고생은 많을지언정 외국의 신문사 사장과 같이 결코 영예스러운 자리는 못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당시 신문사의 사장 자리란 “비단방석이면서 바늘방석”이어서 “여간 호방하고 대담하고 기개 있고 외교에 장하며 또 치밀하지 않으면 하루라도 못하여 먹는 노릇”(《삼천리》 1929년 9월호)이었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기사 검열도 경영난을 가중시켰다. 압수를 당하면 신문을 다시 찍어야 하는데 최소 800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추가로 들었다. 신석우가 인수한 후에도 압수는 다반사였고 정간 조치도 두 차례나 겪었다. 그럴 때면 으레 사장이나 발행인이 당국에 불려가 서약서를 제출하고 벌금형을 받거나 감옥에 갔다. 기자들은 “또 한 건 올렸다”며 압수를 자랑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경영자 처지에서는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일이었다.

신석우가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피한 적도 있었다. 1927년 7월 루마니아 국왕이 사망하자 주필 안재홍이 <제왕(帝王)의 조락(凋落)>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제정(帝政) 제도의 몰락이 시대의 대세임을 말함으로써 은연중 일본 천황제를 겨냥한 것이었다. 당장 총독부로부터 호출장이 떨어졌다. 신석우는 일단 소나기를 피하자는 심정으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태연히 총독부로 들어갔다. 그를 바라보는 총독부 고위관리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신석우가 선수를 쳤다. “아마 사설을 보고 그러는 모양인데 사설이 일본 천황을 비유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모두 제국의 역적이오. <제왕의 조락>이란 구라파(유럽)의 얘기인데 어찌 당치도 않게 천황을 연상한단 말이오.”

쩔쩔매며 사과할 줄 알았던 신석우가 공격적으로 나오자 총독부 경무국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경무국장은 신석우의 말에도 일리가 없지 않고 천황을 빗댄 사설이 나왔다면 자신들도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를 그냥 돌려보냈다.

신석우가 조선일보 경영을 맡은 기간은 모두 6년 6개월이었다. 이상재가 사망한 뒤인 1927년 3월부터는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약 42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조선일보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전 재산을 쓰고도 모자라 적지 않은 빚을 안았다. 이 일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신석우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 첫 의정원 회의에서 ‘대한’을 국호로 제안했다. 여운형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할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지만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며 “일본에 빼앗긴 나라 이름이므로 되찾아야 한다”고 맞섰다. 신석우의 제안에 다수가 공감하고 여기에 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을 붙임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탄생했다.

신석우는 성격이 호방하고 배짱이 두둑해 나폴레옹과 자주 비교되기도 했다. 당시 시인 황석우는 “(신석우가) 만일 프랑스 같은 곳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었다면 반드시 나폴레옹과 공명을 다투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석우의 외모와 인품에 대해 황석우는 이렇게 평가했다.

“눈찌가 씰죽한 커다란 입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야, 이 궐자(厥者, 이 사람) 엔간하고나’ 하는 느낌을 안 가질 수 없게 한다. 특색 있는 입매에 나옹(나폴레옹) 식의 배를 쑥 내밀고 거연 오연히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을 볼 때에는 사해의 바닷물을 다 켜고 앉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삼천리》 1932년 8월호)

신석우는 10대 후반 일본 유학 시절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나이는 어렸지만 말과 행동은 30~40대 같았다. 신석우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쟁쟁한 명사”로 “누구나 외복(畏服)하는 우상”이었다. 밀감과 소바(메밀국수), 활동사진과 기괴한 물건의 네 가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사대호(四大好) 선생’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잡지 《삼천리》에 따르면 그는 앉은자리에서 밀감 2~3궤짝을 까먹고 돌아앉아 메밀국수 8~10그릇을 단숨에 해치웠다고 한다. 밀감 한 궤짝을 먹는 데는 15분이면 충분했다.

조선일보 인수 후 그는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와 자주 비교됐다. “김(성수) 군은 여성적 모사적(謀士的), 신(석우) 군은 남성적 투사적이다. 김 군이 저두하슬(低頭下膝, 머리를 깊이 숙임)하며 손님의 비위를 맞추어 인기를 끄는 영리한 상인이라면 신군은 수틀리면 손님의 뺨따귀를 올려붙이며 ‘에이 건방진 놈의 자식! 가거라, 너 아니라도 물건 팔아먹을 곳이 있다’라고 할 왈자 상인이라 하겠다.” (《삼천리》 1932년 8월호)

신석우는 광복 후 중화민국(대만) 초대 대사로 부임했다. 그의 부인은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의 손위 누이 이범술이었다. 정부는 1995년 신석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아홉 번 감옥 간 장강대하의 문장가
안재홍 1891~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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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2월 의열단 소속의 청년 나석주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했다. 이때 조선일보 주필 민세 안재홍은 경찰 조사 대상 제1호였다. 나석주는 행동을 개시하기 전 조선일보에 거사를 예고하는 글을 보냈고 일제는 이를 문제 삼아 신문을 압수하고 간부들을 소환하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안재홍은 조사를 받으면서도 기개를 꺾지 않았다. 그를 직접 신문했던 종로경찰서장 모리는 안재홍을 “범 같은 놈”이라며 “그 놈이 있는 이상 서장 노릇도 못 해 먹겠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 안재홍을 신문했던 일본군 헌병대좌 아리가 미츠도요는 “도대체 조선의 안씨들은 못마땅하다. 안중근, 안명근, 안창호, 안재홍”이라 중얼거렸다고 한다.

1924년 지면 혁신으로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킨 조선일보의 다음 과제는 신문의 내용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신문의 사시와 논조에 관계된 일이었고 안재홍, 김준연, 이관구, 신일용 등 당대의 논객들이 이 과제를 떠맡았다.

이 중에서도 안재홍은 대표적인 논객이었다.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을 지낸 그는 ‘혁신 조선일보’의 주필로 초빙됐다. 이후 발행인, 부사장, 사장을 거치면서 그는 약 8년간 조선일보에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사설 980여 편, 시평 470편 등 1450여 편에 이르는 글을 쓰면서 네 차례에 걸쳐 1년 이상 옥고를 치렀다. 수감 일수를 빼면 평균 열흘에 7편의 논설이나 시평을 집필한 셈이다. 그는 필화 외에도 각종 시국강연이나 신간회를 비롯한 사회운동으로 일제시대 언론인 중 가장 많은 옥고를 치렀다.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을 복역했다.

그가 쓴 논설과 시평은 압수와 게재금지를 당하기 일쑤였다. 벌금형을 받거나 구속되는 때도 많았다. 대표적인 글이 조선일보 1928년 5월 9일자 사설 <제남사변(濟南事變)의 벽상관(壁上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외국의 사례를 인용해 일본의 산동 출병을 비판했다. 제남사변은 일본이 중국 장개석의 국민군을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산동성 제남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벽상관’은 《사기》에 나오는 말로 ‘형세를 중립적으로 관망한다’는 뜻이다. 그는 압수나 정간을 막고자 최대한 우회적인 표현을 썼으나 총독부는 “국민으로 하여금 출병의 진의를 오해케 하고 국위를 중외(나라 안팎)에 훼손케 하려는 비국민적 집필”(정진석 편,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 Ⅱ》)이라며 그를 구속했다. 안재홍은 금고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조선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133일 간 신문을 내지 못했다.

안재홍을 비롯한 조선일보 간부들은 당시 좌우 진영의 연합체인 신간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일제는 그를 구속하고 조선일보를 정간시켜 신간회와 조선일보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다. 안재홍은 구속되면서도 사원들에게 “미안합니다. 나 한사람의 잘못으로 여러분들까지 영향을 입게 되어서”라며 사원들의 생계를 걱정했다.

안재홍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논지를 폈다. 그의 독특한 문체는 ‘민세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유광렬은 안재홍이 쓴 사설 <제왕의 조락>에 대해 “누가 보든지 장강대하 같은 명문이었다”고 평했다. <제왕의 조락>은 여러 나라 왕실의 몰락을 예로 들면서 일본에도 이런 현상이 올 수 있음을 암시한 내용이었다.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도 제의 붕어 전후가 이미 소조(쓸쓸함)와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더욱 미하엘 신제가 유충한 5세의 몸으로 3인의 섭정에 의한 다난한 발칸 정국의 일 국가지수(國家之首)에 취임했다는 것부터 이미 흔들리는 감촉을 느끼게 하고 소위 주소국위(主小國危, 임금은 힘이 미약하고 나라는 위태롭다)의 옛일을 생각게 하는 것이다. 제왕의 조락은 만근(輓近) 사정의 하나로서 중요한 경향이다.” (조선일보 1927년 7월 23일자)

편집국장 대리를 지낸 이선근은 “민세의 논설들은 참말 대기자라 하리만큼 명문 중의 명문”이라며 “너무 감명이 깊어 그 일부를 욀 정도였는데 사실상 읽은 사람이면 눈시울이 뜨겁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안재홍에게는 원고를 쓰기 전에 점을 치는 버릇이 있었다. 붓으로 한문 문장을 써 성(成), 유(有), 가(可)와 같은 긍정적인 글자가 먼저 나오면 바로 글쓰기에 들어갔다. 반대로 불(不), 무(無), 부(否)와 같이 부정적인 단어가 나오면 잠시 틈을 두었다가 집필을 시작하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 는 “필점(筆占)하고 원고 쓰는 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다.

글을 쓰면서 그는 이따금씩 버럭 소리를 질러 주위 사람들을 화들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대개 원고를 쓰다 막힐 때면 그랬는데 감옥에서 얻은 울화증 때문이었다. 날씨가 추울 때면 글을 쓰다 주먹으로 무릎 근처 다리를 탁탁 치는 버릇도 있었다. 대구 감옥에 있을 때 얻은 병으로 무릎이 시려서였다.

안재홍은 대단한 속필이기도 했다. 밤새워 글쓰기 일쑤였고 아무리 업무에 쫓겨도 마감시간을 넘기는 일이 없었다. 손님이 찾아오면 양해를 구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글을 써내곤 했다. 1920년대 후반 조선일보 논설반 주간을 지낸 이관구는 “민세는 단숨의 필력으로써 사설 한 편을 웅장대담하게 반시간 안팎으로 갈려 써놓는다(《월간조선》 1985년 4월호)고 회고했다.

안재홍은 어린 시절 사마천의 《사기》를 읽던 중 방대하고 날카로운 지혜에 심취해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틈틈이 주변 사람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글을 써 자신의 견해를 나누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날카로운 시국관이 배어 있었다. 부친은 “이 아이가 단명치 않으면 일생 풍운이 심할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안재홍의 외모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붉은 코’ 였다. 그는 “술 먹는 사람 같으면 주독, 무슨 약을 잘못 먹었으면 약독이라고나 하겠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으니까 아마 몸에서 자연이 생긴 무슨 병”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인상에 대해 한 잡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뚱뚱한 체구에 조화가 덜 맞는 듯한 머리, 그리고 작은 얼굴 어느 편으로 보든지 그렇게 인상이 엷어 보이지 않다. 목소리는 연설한 뒤같이 쉬었고, 길게 뻗은 눈청에 보통 사람 3배, 4배 이상으로 껌벅거리는 빛나는 눈 커다란 코, 입, 그보다도 한층 특징은 이야기하시는 중에 가끔 꺽꺽 막히는 증세.” (《삼천리》 1932년 12월호)

안재홍은 1931년 7월 신석우에 이어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다. 그는 사장을 맡으면서 “1400만 문맹을 깨우치는 대중문화운동인 문자보급운동을 한 7년 잡고 매년 대대적으로 진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조선일보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고향의 논밭을 팔아 신문사의 빚을 갚고 직원들의 밀린 봉급을 지불했다. 술과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아 평소 생활은 매우 검소하고 소탈했다. 점심도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 고작해야 사환에게 “시장하여 못 견디겠다”며 미숫가루를 타오도록 해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흥분하거나 화를 내는 일이 없었고 혹시 화가 나도 그저 체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여자 문제에 관해서도 오해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점홍이라는 기생이 한동안 그를 좋아해 밤늦게 과일이나 과자꾸러미를 들고 동생들과 함께 살던 그의 집을 찾아와 애정공세를 폈다. 그때마다 안재홍은 잠자리에 든 여동생을 일부러 깨워 동석시켰다. 점홍은 그를 ‘정신적 애인’으로 모시는 데 만족해야 했다.

안재홍은 조선독립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민족지사였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내부 <의견서>(1936년 7월 16일)에서 그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직업적 혁명운동자”로 규정했다.

“피의자 안재홍은 직업적 혁명운동자인데 전기 주의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로서 조선에서는 비합법적인 활동이 곤란하기 때문에 신문에 원고의 투고, ‘팜플렛’의 발행 혹은 강연, 좌담회 등에 의하여 민족주의 선전 선동을 함으로써 조선민족 독립의 필연성을 고취하여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자발적인 독립운동을 하도록 상시 집요하고 불온언동을 일삼는 악당이다.”

안재홍은 1932년 3월 만주 동포 구호의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영업국장 이승복과 함께 구속됐다. 지국에서 보낸 신문 구독료와 의연금이 섞여 있는 것을 일제가 문제 삼은 것이었다. 그는 결국 옥중에서 사장직을 내놓았다.

안재홍은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건준이 좌익으로 흐르자 곧 탈퇴하고 국민당을 결성해 중앙집행위원장(당수)에 취임했다. 그 뒤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했고 1946년 한성일보를 창간했다. 1947년 2월 미군정 하에서 한국인 최고책임자인 민정장관에 임명되어 과도기 행정체계를 갖추는 데에도 힘썼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평택 무소속) 됐지만 6.25 전쟁 중에 납북됐다.

북한 평양방송은 1965년 3월 1일 그가 평양 시내 한 병원에서 7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장례식은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장의위원회 주관으로 치러졌다. 그는 평양 인근 야산에 묻혔다가 정인보, 현상윤, 백관수 등과 함께 2004년 ‘재북(在北) 인사들의 묘’로 이장됐다.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백남운, 허헌 등이 북한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묻힌 것과 비교하면 한 단계 떨어지는 대우이다. 다만 ‘재북 인사들의 묘’에서 유일하게 그의 묘비에는 ‘애국지사’라는 칭호와 ‘민세’라는 호가 적혀 있다. 정부는 1989년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시인 안혜초는 그의 장손녀이다.

궂은 일 도맡은 언론계의 제갈공명
이승복 1895~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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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신간회 창립을 전후해 조선일보의 경영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영업국장 홍증식이 좌익의 조직망을 확대하느라 많은 돈을 썼고, 후임 영업국장 최선익도 견지동 사옥을 짓는데 거금을 쏟아붓고 물러난 상태였다. 새 영업국장을 물색하던 사장 신석우는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에서 영업국장을 지낸 이승복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 직후로 보인다.

이승복은 자금 동원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는 전주(錢主)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는 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돈 얘기만 나오면 금방 돌아앉는다는 사람들도 일단 그와 이야기를 하고 나면 태도가 달라졌다.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하는 일인데 기꺼이 희사해 주심이 어떻겠소?” 이승복은 정중하고 은근하게 설득했다. 그에 대해 “막후교섭을 벌이는 데 있어서 확실히 제일인자”라거나 “지모로써 개별적인 설득을 벌이는데 있어서 평주(平洲, 이승복의 호)를 넘어설 사람은 없다”(조헌식 전 한독당 중앙위원)는 평가가 있다.

이승복이 영업국장으로 취임한 이후 조선일보의 직원은 130명 정도로 불어났다. 기자 30여 명, 공장 직원 70명, 영업국 직원 30명이었다. 이들 외에 배달원들의 급여까지 본사에서 지급했다. 그는 자금을 융통하러 밤낮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편집이 끝나고 윤전기를 돌려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사원들은 그가 돈을 들고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 신문용지를 구할 수 있고 종이가 있어야 윤전기를 돌릴 수 있었다.

이승복은 장안의 부호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때로는 명월관이나 국일관 같은 고급 음식점에서 이들과 만났다. 이 때문에 오해와 원망도 많이 샀다. 하지만 그는 굳이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원들은 “우리는 월급도 못 받는데 영업국장은 돈 많은 유지들과 어울려 일급 요릿집만 찾아다닌다”고 푸념했다.

주위 사람들은 자금을 잘 융통하는 그를 두고 ’난국타개의 일인자‘ ’소제갈(小諸葛, 작은 제갈공명)‘이라고 부르곤 했다. 물론 그에게도 돈을 끌어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빌린 돈을 제때에 갚지 못해 고발당하기도 했고 사기꾼으로 몰리기도 했다. 수시로 집안의 돈도 끌어들였다.

한번은 조선일보 원산지국장 강기덕이 이승복을 찾아왔다. 그는 지국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파면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승복에게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승복은 대범하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의 설명이 어찌나 조리가 있었던지 강기덕은 머리를 숙이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돌아갔다고 한다. 강기덕은 훗날 신간회 해소(해산) 대회 때 위원장으로 선임돼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이끈 이승복과 다시 한 번 얄궂은 운명으로 얽히기도 한다.

이승복은 일본어를 쓰지 않았고 일본인과는 교제도 하지 않았다. 총독부나 일제 기관의 행사에 조선일보 간부들이 초청될 때면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 나가곤 했다. 그는 장녀인 이예원을 굳이 배화여고로 진학시켰다. 당시 배화여고는 교장 이만규의 뜻에 따라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민족교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운형과 안재홍의 딸들도 이 학교에 다녔다. 이승복은 딸을 ‘신문의 귀재’로 불리던 이상협의 장남 이중희와 결혼시켰다.

이승복은 조선일보와 신간회 양쪽에서 궂은일을 도맡았다. 독립운동가 박중화는 그에 대해 “남달리 스케일이 큰 영웅적 기질을 지녔으나 좋은 자리는 남에게 맡기고 자기는 늘 후선에서 일만 해왔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여기자 최은희는 “그 빼어난 인품과 남다른 인성에 탄복하여 새 중에서도 펠리칸을 연상, 그분을 ‘인간 펠리칸’이라고 혼자서 떠받들고는 했다”고 말했다.

영업국장 이승복 밑에서 광고부장으로 일했던 김인현은 이렇게 증언했다.

“곁에서 지켜보니까 신간회의 실제 일은 모두 평주(이승복의 호)가 했어요. 각계각층의 저명한 인물들을 끌어들인 것이 모두 평주의 힘이었고 자금동원이라던가, 당시 사회운동 전개가 모두 평주의 역량으로 되었습니다.“ (《삼천백일홍》)

이승복은 1924년 5월 동아일보 조사부장으로 입사하면서 신문사와 인연을 맺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뒤 잠시 귀국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였다. 이 무렵 그는 홍명희, 홍증식, 김찬 등과 함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 조직을 주도했고 신사상연구회가 운동단체인 화요회로 변신한 뒤에도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사업부장으로 있던 홍명희·홍성희 형제는 그에게 신문사에 들어와 민족운동을 같이 하자고 권했다. 그는 처음에는 “여태껏 내 손으로 대정 연호를 써 본 일이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문사에 들어가면 일제와 부득이하게 타협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홍명희는 “우리들 양가(兩家)는 같은 애국의 명가가 아니오. 다만 자살과 타살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라며 간곡하게 설득하여 그의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자결로써 절의를 지켰다. 또 한말 참판까지 지낸 이승복의 조부 이남규와 부친 이충구는 의병활동을 지원하다가 1907년 9월 모두 순국했다. 홍명희가 ‘자살과 타살의 차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승복의 동생 이창복은 헤이그 밀사 3인 중 한 명인 이상설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집안은 이리저리 항일운동과 얽혀 있었다.

이승복은 1925년 3월 홍명희와 함께 시대일보로 옮겼다가 이 신문이 1926년 여름 휴간한 뒤 문을 닫게 되자 조선일보에 정착했다. 주필 안재홍과 편집국장 한기악이 각각 논조와 편집을 책임졌다면 이승복은 5년여 간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일보의 실질적인 경영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는 1932년 3월 만주 동포 구호의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안재홍과 함께 투옥된 뒤 감옥에서 사직했다. 1934년에는 잠시 만주로 나갔다가 귀국해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3월 이승복은 예비 검속에 걸려 헌병사령부에 구금되었다가 감옥에서 광복을 맞았다.

이승복은 안재홍, 한기악, 홍명희와 각별한 교우관계를 맺었다. 한기악은 소학교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다. 이승복은 1913년 첫 망명길에 올라 러시아를 떠돈 뒤 귀국할 때 한기악과 동행했다. 안재홍과는 신간회 창립을 준비하면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안재홍이 건준에 참여했다 탈퇴할 때 이승복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안재홍은 민정장관 시절 출퇴근할 때 자주 명륜동 그의 집에 들러 의견을 구했다고 한다.

광복 전후 이승복은 절친했던 이들과 헤어져야 했다. 한기악은 광복을 못 본 채 세상을 떠났고 홍명희는 1948년 월북했으며 안재홍은 6.25전쟁 중에 납북됐다. 이승복은 광복 직후 국민당 총무부장,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미군정 선거법제위원 들을 지내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45년 8월 건준의 교통부장으로 임명됐으나 끝내 고사했다. 1951년 1·4후퇴 때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낙향하여 1978년 83세로 타계할 때까지 27년 간 이승복은 일체의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했다. 그는 백일홍을 가꾸며 소일했다. 그의 팔순 기념 문집의 제목은 《삼천백일홍》이다.

1980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장남 이문원은 중앙대 교수를 거쳐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냈다.

“인재를 보배로 삼아야”
조만식 1883~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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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장 조만식은 새 사주로 영입한 방응모와 함께 흰 화선지 앞에 섰다. 먼저 방응모가 붓에 먹을 찍어 써 내려갔다.

“濟濟多士(제제다사)”

‘재주 있는 많은 인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 문구는 주나라 문왕이 훌륭한 인재를 많이 등용해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고사에 등장하는 말이다. 방응모는 “일등 가는 사람을 찾아내 일등 가는 대우를 해야 한다”는 자신의 경영 철학을 이 휘호를 통해 밝혔다.

조만식은 방응모의 글씨 옆에 일필휘지로 화답했다.

“其仁爲寶(기인위보)”

‘많은 인재들을 인(仁)으로 끌어안아 보배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조만식은 1932년 11월 23일 조선일보 사장에 추대되어 이듬해 7월 19일 방응모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고문으로 물러날 때까지 약 8개월 간 사장으로 재임했다. (1932년 6월 15일 취임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사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사채업자 임경래가 판권을 쥐고 있었고 이전 사장 안재홍을 지지하는 사원들이 제작을 거부하는 등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조만식은 방응모에게 조선일보 인수를 종용하는 한편 내분을 앓고 있는 회사를 추스르는 역할을 자임했다. 당시 사회부 기자 홍종인에 따르면 “그 분란통에 조만식 선생님께서는 몇 날이고 사장실에서 밤을 새우며 그 분경꾼들의 시비와 농락을 다 받았다”고 한다.

조만식은 일부 사원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안재홍과 전 영업국장 이승복을 다시 경영진으로 옹립하려는 사회부장 김기진, 사회부 기자 조경서, 편집부 기자 권태휘 등은 사장실에 들어가 조만식에게 퇴진할 것을 요구했다.

“사장부터 물어나시오!”

조만식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들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런 말이 없소?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소?”

화가 난 조경서가 언성을 높이자 조만식은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앙천부지(仰天俯地) 부끄러운 것이 없소.”

조만식의 당당한 태도에 김기진도 존경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의 꼿꼿하고 의젓한 자세에 탄복했다“고 회고했다.

조만식은 민족지도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민족운동자로서 일관한 30년간의 고행”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남이 따르지 못할 온정과 겸손”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재욕, 명예욕, 야심, 교만은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동광》 1931년 1월호). “그에게 우리는 위인의 존경을 바치기를 주저할 수 없다”(《신동아》 1932년 5월호)는 것이 조만식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였다. 무릎까지 올라간 “몽당치마 같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는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은 늘 화제였다. 한 어린 급사는 입사하던 날 사장 조만식을 보고 그의 검소한 모습에 탄복했다.

“머리도 아무렇게 깎으시고 수염도 안 깎으신 데다 조선 수목 두루마기가 더구나 무릎까지 올라오는 짤따란 것, 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버선에다 고무신을 신으신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점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선생님의 이 놀랍게 검소하신 데 대하야 진정으로 탄복하였던 까닭입니다.” (《별건곤》 1933년 4월호)

평남 강서 출신의 조만식은 1915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 지역에서 농촌진흥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방응모를 잘 알고 있었다. 방응모도 조만식에게 존경을 품고 있었다. 나이는 조만식이 한 살 위였지만 서로 존대하는 사이였다. 조만식과 방응모는 19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오산학교 부흥 운동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1933년 3월 22일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에 취임한 뒤에도 조만식은 4개월 간 더 사장을 맡았다. 조만식은 태평로 사옥이 건축될 무렵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슬쩍 평양으로 떠났다. 자신은 신문사 사장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홍종인은 “선생의 생각으로는 신문사 사업이 우리 민족운동의 중요한 일임을 잘 아시는 터라 일본 사람들과 자주 상종하며 무엇인가 서로 거래도 하여야 하는 일을 자신이 하실 일이라고 생각지 않으셨다”고 했다.

조만식은 사장에서 물러나 평양으로 간 뒤에도 조선일보 고문과 취체역(이사)을 맡아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주주총회가 있으면 경성에 올라와 참석하고 죽첨정(현 충정로) 방응모 집에 머물렀다. 방응모는 중학생이던 장손 방일영에게 조만식의 잠자리를 돌보도록 하고 함께 모시고 자도록 했다. 장손이 손님을 모시는 것은 귀빈을 배려하는 최대의 예의였다. 방일영은 이렇게 회고했다.

“조만식 선생님께서 주주총회의 일로 올라오시면 4~5일 간 머무셨는데 여관에 안 가시고 꼭 죽첨동 집에서 유(留)하셨다.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셔서 두루마기까지 단정히 차려 입으시고 바로앉아 계셨다. 주무시는 일까지 내가 모셔야 하였기에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정좌하시는 일이 중학생이던 나에게는 적잖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중학 시절에 한 서너 번 계속되었다.” (《태평로 1가》)

조만식은 1935년 6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대립이 심해지자 화해를 주선했다. 두 신문은 동아일보 계열이었던 보성전문 입학생 문제를 발단으로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조만식은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송진우, 조선일보의 방응모와 서춘 등을 조선호텔로 초청해 “두 신문사의 싸움이 민족적으로 불리하다”고 설득했다.

광복 후 조만식은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립하고 당수에 취임했으나 신탁통치 반대 의견을 표명하다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됐다. 이후 사망 여부가 알려지지 않다가 1991년 북한 외무성 부상(副相)을 지낸 박길룡의 증언으로 그의 최후가 알려졌다. 6·25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8일 밤 대동강변에서 500여 명과 함께 총살되었다는 것이다.

조만식은 부인과 사별한 후 1937년 이화여전 출신 전선애와 재혼했다. 아들 조연흥은 1967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사회부장, 제작국장,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방일영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조선일보를 인수해 중흥시킨 금광왕
방응모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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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말 경영난과 내부 분란으로 표류하고 있는 조선일보를 평북 정주의 금광왕(王) 방응모(方應謨)가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주요한은 여러 차례 정주로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 인수를 설득하고 있었고, 사장 조만식도 방응모에게 조선일보의 경영을 맡으라고 종용했다. 조선일보는 사채업자 임경래가 판권을 장악, 이에 반대하는 기자들과의 분란으로 신문이 제대로 발행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방응모는 서울 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신문과의 관계라곤 1922년부터 5년 간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운영했던 경력이 전부였다. 그는 50세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중앙 무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 적이 없었다. 맨손으로 광산에 뛰어들어 일확천금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졌을 뿐이다.

방응모는 마흔 살에 접어든 1924년 삭주 교동(橋洞, 다릿골)의 폐광을 뚫기 시작해 3년 만에 금맥을 발견했다. 좁쌀로 연명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은 끝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그의 광산은 성장을 거듭해 1930년대 초반에는 종업원 1000여 명을 거느린 국내 굴지의 광산이 되었다. 종업원 1599명의 조선 최대의 광산인 일본 해군성 소유의 평양광업소와 1400명을 고용한 미국 자본의 온산 금광과 필적할 만한 규모였다.

조선에서 금광 개발로 거부가 된 사람은 방응모 외에도 최창학과 김태원 등이 있었다. 이들의 성공은 금광 열풍을 가져와 당시를 ‘황금광(黃金狂) 시대’라 일컬을 정도였다. 방응모는 여느 금광왕과는 달리 정주에 소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장학회를 운영하는 등 공익사업을 펼쳤다.

당시 신문사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자선사업 정도로 인식됐다. 언론사업이란 수익은 없고 골치만 아픈 사업이었다. 잡지 삼천리는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를 “부호의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인격자”로 평가했다.

“오늘날 조선의 신문사업은 아직까지 소모사업에 속한다. 소모사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리사업은 못 된다. 그 증거로 10년 기초를 닦아 수지가 맞는다는 동아일보에서도 주주배당이라고는 유사 이래에 한 푼 없어 왔다. 이와 같이 영리사업이 아닌 기관에 50만금씩 던지는 분이 있다면 그는 존경에 값하는 인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중략) 금후의 금광왕들은 모두 방응모씨를 본받아 사회와 고락을 같이하여 주기를 바란다.”(《삼천리》 1933년 10월호)

당초 대학 설립에 뜻을 가지고 있었던 방응모는 동향(同鄕) 선배인 조선일보 사장 조만식의 권유를 받아들여 총 50만원을 납입하고 조선일보를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불입 자본금이 35만원, 매일신보의 자본금이 50만원이었다.

방응모는 1933년 3월 부사장에 취임한 뒤 4월 26일자 ‘혁신 기념호’에 사장 조만식과 나란히 <취임에 임하야>라는 글로 독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어 27일자 <드리는 말씀>에서 그는 “민족에게 유익하고 공중에게 공헌되는 것이 있으면 심신이나 재산을 제공하는 데 조금도 주저치 않는다”는 ‘평일의 신조’를 밝혔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휴·폐간은 우리 전체의 대암영(大暗影)이요 대손실”이기 때문에 인수를 결심했다고 밝힌 뒤 조선일보는 “우리 조선 민중의 공유물”이지 “몇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고 선언했다.

1933년 7월 조만식에 이어 제9대 사장으로 취임한 방응모는 과단성 있게 사업을 펼쳤다. 웅장한 규모의 태평로 사옥을 착공하고 1935년에는 언론사 사상 최초로 취재용 비행기를 구입했다. 월간지 《조광》 《여성》 《소년》을 잇달아 창간했다. “조선일보의 신흥기운은 욱일승천의 기세”(《별건곤》 1933년 11월호)였다. 1933년 조선일보의 보급 부수는 2만9341부로 동아일보(4만9945부)의 절반가량이었지만 방응모 사장 취임 후 3년 만에 6만626부로 동아일보(3만 1666부)를 두 배 이상 앞서기 시작했다.

1940년 1월 22일 방응모는 조선일보 출판부를 독립법인으로 만들어 조광사를 설립했다. 일제의 조선일보 폐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폐간 이후 월간 잡지 《조광》에는 일본어로 된 기사가 실리고 일제의 전시정책을 지지하는 글도 실렸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언론에 강력한 통제를 가했다.

그러나 조광에는 우리 역사에 대한 글도 실렸다. 1942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연재된 <조선과학사>는 조선에 과학 발전의 역사가 있음을 쓴 역작이었다. 이밖에도 <무오사화의 숨은 동기>(1941년 1월호), <조선외교사의 일단(一端)(1944년 1월호), <혜초 왕오천축국전 잔권(殘卷)에 취하야>(1944년 2월호) 등을 실어 우리의 역사를 일깨웠다.

일제시대 방응모는 독립운동가를 후원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안창호가 경성의전 부속병원에 입원했을 때 선뜻 500원을 내기도 했다.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병원에서 운명했고, 이때 방응모, 김성수 등이 낸 조위금으로 장례를 치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으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으로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의 장례비를 댄 사람도 방응모였다. 그의 손자 김중생은 “1937년 할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만해 한용운 선생이 시신을 수습했고, 계초 방응모 선생이 자금을 내놓아 5일장을 치렀다” (《조선일보》 사외보 2003년 10월)고 말했다.

방응모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소식지를 찍어내는 데 활자를 제공하기도 했다. 전 광복회장 이강훈은 간도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를 회고하면서 “당시 계초 방응모 선생께서 조선일보의 자모활자를 빌려 줘 독립운동 소식을 찍어 알리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조선일보》 1991년 11월 12일)고 회고했다.

광산 시절부터 육영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방응모는 장학회를 만들어 젊은 인재들을 후원했다. 방응모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1933년 12월 이심회(以心會)라는 친목 모임을 결성했다. 방응모는 1933년 한 해에만 유학생들의 장학금으로 1만2000원을 후원했다. <이심회 회보>에 나타난 이 해 회원은 모두 14명으로, 방종현(方鍾鉉), 백석(白石), 노의근(盧義根), 노좌근(盧佐根), 정옥순, 노보희, 문동표, 황종률, 김승범, 방재윤, 방재경, 이갑섭, 정근양, 이만영이다.

방응모의 장학사업은 조선일보가 폐간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심회는 서중회(序中會)라는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서중회 회원은 약 75명이었다. 사회부 기자였던 문인 김기림, 소년조선일보를 맡았던 출판부의 윤석중, 문학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 좌파 철학자 박치우, 역시 좌파로 6·25 후 월북해 김일성대학 교수를 지낸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 등이 포함된다. 서중회 회원이었던 전 문교부 장관 민관식은 “대학을 졸업한 1943년까지 3년 간 꼬박꼬박 장학금을 받았다”고 했다. 장학금은 월 60원 정도로, 수업료와 하숙비를 지불하고도 일주일에 한 번쯤 학생 비어홀에 갈 수 있는 큰 액수였다고 한다.

방응모는 일제의 요구에 시국강연에 불려 다니기도 하고 임전대책협력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 단체에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이 총망라됐다.(《삼천리》 1941년 11월호) 1948년 8월 반민특위가 발족했을 때 방응모는 “시국강연 기타에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씨와 같이 당시 신문사 사장으로 부득이 참가한 듯하며 특히 배일도 친일도 한 사람이 아니다”(《친일파 군상》)는 평을 들었다.

방응모는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있어 ‘꼬장꼬장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성격에 대해선 여러 사람의 증언이 전하고 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다”(전택보), “어물어물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신문경영에 과단성이 있었다”(유봉영), “자손들에게는 아주 엄했다“(이관구), “사원을 집안 식구처럼 대해 주는 따스한 인간미를 보여 주었다”(김봉원), “아랫사람과 의견이 갈려 논쟁을 벌이다가도 일단 그 의견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면 서슴없이 굴복하는 아량을 보였다”(홍종인) 등이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이상재의 손자 이홍직은 조선일보 발전에 남긴 방응모의 업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방응모 사장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형으로 보였으나 치밀한 성격은 비범했다. 멋을 전혀 부리지 않고 근실했으며 그 규모가 대단히 큰 분이었다. 그러기에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키우고 한국 언론에 있어서 민족지로서의 기반을 확립시킨 공을 남길 수 있었다.”(《계초 방응모전》)

방응모는 1950년 5·30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6·25 전쟁 발발 후 그는 자택에 머무르다 7월 6일 납북되었다.

방응모는 금광을 뚫기 시작하던 무렵인 1924년 8월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들였다. 방재윤은 의주농업학교와 일본 중앙대를 졸업하고 평북 박천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6년 2월 조선일보 서무부원으로 입사했다. 방재윤은 1936년 8월 조선일보 백두산 탐험대의 총무로 참가했고 1937년 5월부터 초대 사업부장을 지냈다. 그는 부친 방응모가 함남 영흥에서 펼친 조림 사업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1940년 4월 식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해 주사를 맞다가 사망했다. 방응모가 납북된 이후 조선일보를 이끌어 온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재윤의 두 아들이다.

친일파 권총 앞에서도 당당한 편집국장
한기악 1898~1941
사진1927년 9월 일본 언론인들이 조선일보를 방문했을 때 사옥 앞에서 함께 기념촬영을 한 편집국장 한기악(앞줄 오른쪽). 앞줄 왼쪽이 당시 사장이었던 신석우이다.

1928년 어느 날 조선일보 편집국은 긴장 속에 빠져들었다. 친일파로 유명했던 박춘금이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을 지낸 일본인 비서를 대동하고 편집국장 한기악에게 면회를 신청한 것이다. 박춘금은 1920년 일선융화(日鮮融和)를 주장하는 노동자단체 상애회를 만들어 조선인 노동자를 착취하고 폭행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김성수를 감금한 뒤 권총을 들이대며 위협한 적도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기사를 통해 농어민을 협박해 농토를 강탈하는 박춘금의 행태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무슨 행패를 부릴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한기악은 주저 없이 면회를 받아들였다. 박춘금은 비서를 문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편집국으로 들어섰다. 그는 신문을 꺼내 자신을 공격한 기사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기악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험악한 상황이었지만 둘의 대화는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박춘금이 일본어로 소리를 지르면 한기악은 우리말로 응수했다. 박춘금이 “당신 절대로 취소는 못 하겠단 말이지?”라고 일본어로 악을 쓰면 한기악은 우리말로 “그렇다. 할 말이 있으면 정식으로 고소를 하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박춘금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다 마침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

한기악은 “당신 때문에 기자들이 일을 못하고 있으니 다른 방으로 가자”고 말하며 일어섰다. 그는 박춘금을 데리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 신석우는 외출 중이었다. 사장실에 들어간 한기악은 먼저 문부터 걸어 잠갔다. 편집국장이 권총을 가진 박춘금과 문 잠긴 방에 단 둘이 있게 되자 기자들은 더욱 긴장했다. 사회부장 유광렬, 학예부 기자 심훈, 사회부 기자 김동환과 양재하가 사장실 앞에서 몽둥이를 들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공장 직원 중에는 쇠망치를 들고 온 사람도 있었다. 만일 국장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지면 문을 부수고 들어갈 태세였다.

사장실 밖으로 큰 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춘금은 여전히 “취소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한기악은 “못 한다”고 응수했다. 수십 분 실랑이 끝에 박춘금은 권총을 집어넣고 “어디 두고 보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을한은 “이 싸움은 필경 편집국장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며 “우리는 약한 듯하나 기실은 강한 월봉(한기악의 호) 선생에게 무한한 갈채를 보냈던 것이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신문기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편집국에 쳐들어와 기자들을 위협하고 폭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때로는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도 편집국에 쳐들어왔다. 한기악은 사회부장 유광렬에게 “밖에서 오는 시비는 내가 맡아서 책임질 터이니 당신은 신문만 바로 만들라”고 말했다. 유광렬은 그를 “지사 편집국장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1930년 10월 한기악은 경영난 타개에 전념하고자 편집국장에서 물러나 업무 담당 이사로 취임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최악의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식당 외상값도 갚지 못할 형편이었다. 한 식당의 주인은 밀린 외상값을 내놓으라며 한기악의 집에 찾아와 드러눕기도 했다. 그러자 한기악은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마련해 사원들에게 제공했다.

한기악은 신문 제작과 경영난 극복에 신경 쓰다 결국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둘째 아들 한만년(전 일조각 사장)은 이렇게 기억했다.

“웬일인지 집에서 쌀과 간장, 된장을 퍼내고 매일 20~30명분의 저녁을 날라 가고 저녁마다 10여 명의 신문사 사원들이 식사를 하고 가고, 밤에는 노상 구수회의가 벌어지곤 했다. 얼마 후 선친께서는 병환으로 입원을 하게 되고, 집도 팔려서 우리는 왕십리 밖 안정사라는 조그마한 절 옆으로 이사했다.”

한기악이 병원에 입원하자 잡지 《동광》(1932년 11월호)은 “원래가 온화한 (한기악) 씨가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머리를 썩혔기에 거기까지 이르렀는가 하여 동정하는 사람이 많다”고 썼다.

한기악은 1917년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하고 만주, 시베리아, 상해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거짓 편지를 받고 귀국했다. 그의 할머니는 그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손자마저 잃게 됐다며 침식을 전폐했다. 한기악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20대 나이에 요절했다.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낸 할머니는 하나뿐인 손자 걱정에 몸져누웠고 보다 못한 한기악의 처남이 ‘조모 위독’이라는 기별을 띄운 것이다.

그는 귀국 직후인 1920년 4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경제부장과 편집국장 대리를 역임했고 1925년 시대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26년 조선일보로 옮겼다.

그는 미남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최상덕은 그에 대해 “희고 둥글납작한 얼굴, 빚어 붙인 듯한 코, 조붓한 입, 웃으면 하얗게 드러나는 호치”를 가졌다며 “이것만 해도 99점에 상당한 미용인데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까지 가졌다”고 평했다. 한기악의 아들 한만년은 “선친은 미남자라는 평을 받으셨고 당대 장안 3대 미남자니 무엇이니 하여 잡지 가십난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한기악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면서도 안주로 나온 국물은 혼자 다 마시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국물’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손자가 들어올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는 할머니 생각에 그는 아무리 취해도 동료들에게 업혀서라도 반드시 집에 들어갔다. 사정을 아는 동료들은 그가 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도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퇴원 후 왕십리 집에서 요양하던 한기악은 1935년 중앙학교 감사가 되었다. 평소 그는 “돈 10만원이 있으면 조선의 불우한 천재들을 교육하는 사업에 쓰겠다”고 했다.

그는 5대 독자이자 유복자였다. 남편의 장례를 치를 때까지 태기를 느끼지 못했던 그의 어머니는 어느 지관으로부터 “제절(除節, 산소 앞 뜰)에 자손이 가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대가 끊겼다고 안타까워하던 문상객들은 지관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지관의 예언대로 그의 자손들은 제절 앞에 가득하게 된다. 한기악의 장남 한만춘은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고, 차남 한만년은 출판사 일조각을 경영하며 학술서적을 많이 냈다. 삼남 한만청은 서울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손자들도 학계로 많이 진출했다. 한만춘의 아들인 한민구(서울대), 한인구(한국과학기술원)와 한만년의 네 아들인 한성구(서울대), 한경구(서울대), 한준구(서울대), 한홍구(성공회대) 등이 모두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희승은 “월봉(한기악)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가였고 교육자였으며 지사적인 언론인”이라고 평했다. 1941년 타계할 때까지 한기악은 독립운동을 하던 때의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민족사학자의 꼼꼼한 글쓰기
문일평 1888~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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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은 1933년 4월부터 1939년 4월 타계할 때까지 6년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주로 <사외이문> <화하만필> 등의 역사칼럼과 사설을 집필했다.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그는 1928~1931년에도 조선일보에 몸담았지만 이때는 배재- 중앙고보 교사를 겸직했다.

문일평은 박은식, 신채호와 더불어 역사논설을 통해 일제 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그는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1934년 5월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서 실증적 학문연구를 주장한 진단학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당대에도 “역사연구가로 이름”(조선일보 1926년 8월 12일자)이 높았고 “조선의 사가로서 또 평론가로서 우리 학계와 논단에 혜성 같은 존재”(조선일보 1939논 4월 5일자)로 평가됐다. 저서로 사후 출간된 《호암전집》 《호암사화집》 《소년역사독본》 등이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심’을 강조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공로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2003년 5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남긴 한국사에 대한 방대한 글은 대부분 조선일보 지면에 발표된 것들이다. 그는 어린이를 위한 ‘학습페-지(페이지)’ 난에 우리나라 역사와 인물에 대한 글을 타계할 때까지 연재했다. <역사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연재물에서 그는 석굴암-첨성대-불국사-화랑도, 왕건-최영-정몽주-문익점-김종서-박연 등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문화와 인물을 부각시켰다. 타계 후에도 유고가 실린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연재에 열정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사설은 1면 머리에 실렸다. 원래 사설은 무기명으로 실리기 때문에 집필자를 알기 어렵지만 문일평이 남긴 1934년도 일기를 보면 이 한 해 동안 그가 쓴 사설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일평은 조선일보 제호가 찍힌 탁상용 달력에 하루도 빠짐없이 한문으로 일기를 썼다. 일기에 따르면 그는 연재물 기사 외에 한 달에 2~3회 꼴로 사설을 집필했다.

문장가 문일평이 쓴 사설이라고 해서 언제나 그대로 신문에 실린 것은 아니었다. 주필 서춘은 그의 사설을 놓고 첨삭을 주문하며 질타하거나 다른 논설위원에게 다시 쓰도록 하기도 했다. 1934년 3월 10일 문일평은 사설 문제로 서춘의 질책을 받은 뒤 술을 엄청나게 먹고 집에 돌아와 모두 토했다. 5월 13일에는 <문명과 성병>이란 사설을 썼으나 서춘이 “전후 문맥이 닿지 않는다”며 홍기문과 홍양명에게 다시 쓰라고 했다. 이날 문일평은 “마음이 불쾌해서 종일 두통에 시달렸다”고 했다.

주로 역사와 문화 방면의 사설을 집필한 문일평은 속필은 아니었다. 1930년 편집국장 대리를 역임한 이선근은 “문일평이 미처 시간에 대서 쓰지 못하면 안재홍이 15분 만에 글을 써서 던졌다”고 회고했다. 1935년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우승규는 “문일평은 결벽이 남달라 원고를 쓸 때 잘못된 글자가 있으면 손가락에 침칠을 하며 싹싹 지웠다”고 증언했다. 문일평은 바쁜 와중에도 “어떤 어휘를 쓰면 좋겠느냐”며 초년 기자에게 묻기도 했다.

문일평 스스로도 글 속도가 늦은 것에 대해 괴로워했다. 그는 1934년 9월 9일 일기에서 “오전 9시 회사에 가니 정위당(정인보)이 방문해 있어 다산 실학의 대강을 듣고 사설을 불과 세 시간 만에 썼다”며 “자료가 많을수록 속도가 빨라짐을 알겠다”고 했다. 또 이 해 12월 16일 일기에선 “사설 ‘내한운동(耐寒運動)과 동기등산(冬期登山)’을 세 시간 만에 썼다”며 “요즘 지체증이 조금 나아졌다”고 기뻐했다.

문일평은 사람이 좋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우승규는 그에 대해 “언론인보다는 문사”였다고 회고하면서 “호암(문일평의 호) 선배는 원래 단아한 선비였다. 일상 부드러운 웃음빛을 띠고 사람을 대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보면 공손한 태도가 한결같았다. 봄바람이 나부끼는 듯 온후한 한국적인 신사였다”고 말했다.

문일평은 어린 사동에게도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새파란 신입사원에게도 존대어를 썼다. 때로는 너무 저자세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술을 몇 잔 먹으면 “망국의 한”이 폭발했다. 유난히 큰 눈을 부라리며 “두고 보라니까, 왜놈은 망할 테니”하고 소리를 질렀다. 함께 술을 먹던 동료들이 진땀을 흘린 것은 물론이다. 동료들은 문일평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갈 때면 “제발 왜놈 욕은 하지 말아 달라”고 빌다시피 했다.

문일평은 1939년 4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인은 급성단독(상처 난 피부로 세균이 들어가서 열이 높아지고 얼굴이 붓게 되어 통증을 일으키는 전염병)이었다. 그의 뜻하지 않은 죽음에 대해 홍명희는 “아 슬프다. 슬픔이 속에서 우러나와서 억제할 수 없구나”라며 “우리는 좋은 친구를 여의어서 슬프지만 호암이야 요란한 세상을 떠나서 편안하려니, 답답한 세상을 떠나서 시원하려니 무엇이 슬프랴”(조선일보 1939년 4월 8일자)고 애도했다. 한 소학교 학생은 조선일보로 편지를 보내 그가 쓴 ‘역사 이야기’를 더 이상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매일 배달되는 조선일보를 읽는 중 문일평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니 이런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중략) 오랜 옛날 우리 할아버지 때 일, 또 그 역사는 나 같은 어린 것은 생각지도 못할 것이지마는 문일평 선생님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가르쳐 주시는 글을 통하여서 배운 것도 많을뿐더러 얼마나 재미를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략) 조선의 어린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수고하여 주시는 선생님들이 이렇게 한 명 두 명 세상을 떠나시니 얼마나 마음에 섭섭한지 모르겠습니다.” (소년조선 1939년 4월 16일자)

문일평이 쓴 역사 논설은 그의 사후 조선일보에서 《호암전집》으로 간행됐다. 방응모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호암은 여(나)의 지기의 한 사람이다. 여가 본 호암은 염직개결(청렴하고 강직하며 꼿꼿하고 깔끔함)한 선비로 역사가요, 교육가요, 언론가였다. (중략) 호암은 너무도 겸손하여서 그 생전에 자기 작품을 완벽이라고 하여서 인행(인쇄하여 간행함)을 즐기지 아니하였다. (중략) 호암은 집필할 때에 사가의 태도를 엄수하였다. 그래서 춘추의리는 물론 그 논문의 일자일행이 해박한 고증과 적절한 비평 없이 된 것이 없다.”

문일평의 큰아들 문동표는 방응모 장학금을 받고 동경 유학을 다녀온 뒤 193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1947년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나 월북했다. 문일평의 외손녀는 고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의 부인이다.

감성과 지성 겸비한 ‘공채 1기’ 시인
김기림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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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조선일보에서 문인기자들의 시대를 화려하게 연 사람은 김기림(金起林)이었다. 김기림의 선배 문인이자 기자였던 염상섭은 기자와 작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기자들의 글쓰기란 기능적인 것이고 순수함이 거세된 글쓰기로 이해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문인들에게 예술은 생활과 분리되는 것이었다. 문인이 기자라는 직업을 갖는 것은 생활을 위해 예술을 희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일본에서도 “신문은 번창해가고 문장은 졸렬해진다”는 속언이 유행했다.

염상섭은 이 이중생활을 ‘쌍수집병(雙手執餠, 양 손에 떡을 쥐는 것)’의 두 갈래 물결이라 불렀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창작 생활을 겸무겸직으로 하자면 머리의 조직부터 달라야 하고 체질과 건강이 쬔병아리나 골생원으로 생겨서는 안 될 일”이라고 기자와 문인을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김기림에게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김기림은 신문기자와 작가라는 존재의 양 둔덕 중 어느 곳이 자신의 등을 편안하게 뉘어 주는 곳인지 알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신문기자/작가’는 멀리 있는 양극단이 아닌 서로 겹치면서 지우는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염상섭이 신문기자와 작가를 ‘역설’의 측면에서 이해하려 했다면, 김기림은 ‘평행’의 차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김기림은 현대생활의 총체를 이루는 작업이 신문기자임을 표 나게 내세웠다.

김기림은 ‘신문기자의 꽃’이라는 사회부 기자에서 출발해 학예부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는 선배문인들과 달랐다. 이 ‘다르다’는 의식은 김기림을 비롯한 신세대 문인기자들의 선명한 자기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원조, 백석, 함대훈, 박팔양, 이여성, 한설야, 이석훈 등이 조선일보에서 김기림과 함께 혹은 앞서거니 혹은 뒤서거니 하면서 기자 생활을 했다. 그들은 직장 동료이자 친구였으며 내면적 소통이 가능한 문학적 동지들이었다.

김기림은 일본대학 문학예술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1930년 4월 20일 조선일보 1기 공채기자로 입사했다.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은 “일류라고 손꼽히는 인물”들의 경연장이었다. 사장 신석우, 부사장 겸 주필 안재홍, 편집국장 한기악, 정치부장 이선근, 교정부장 장지영, 학예부장 염상섭, 경제부장 정수일, 사회부장 이여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기림이 속한 사회부에는 홍종인, 박윤석, 양재하, 신영우, 이원용 등이 있었고, 정치부에는 함대훈, 홍양명, 학예부에는 안석주 등이 있었다.

김기림은 그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기자상에 적합한 품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시인이자 수필가로 문단에 이름을 등재했던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문학적 인간형이기도 했지만 문학이론가, 비평가, 시사논평가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 보일 만큼 이지적이고 분석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도 학예면에 문학사에 기록될 많은 문학적인 성과물을 남긴 한 요인이기도 했다. 동료기자 이원조는 김기림이 “숫자투성이의 통계표만 가지고도 재미있는 기사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재주를 가졌다”(조선일보 1939년 12월 15일)고 말했다.

당대의 문인, 기자들에 대한 스케치를 남긴, 여류 작가이자 조선일보 여기자였던 이선희는 <작가 조선인 군상>(《조광》 1936년 4월)이라는 글에서 김기림을 한 마디로 “모범청년”이라 불렀다. 신문사 동료들은 김기림이 단 한 번의 지각이나 조퇴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한 인물이며 능력 또한 탁월하다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는 혼자서 4~5명의 일을 거뜬히 해치울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회사 간부들의 김기림에 대한 신임도 두터웠다. 김기림은 결혼해서 남매를 두고 있었는데, 사윗감을 찾던 장안의 명문가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한숨을 쉴 정도였다는 것이다. “기자 채용시험에 입격(入格, 합격)하야 사회부에 재근(在勤) 중이다. 출생지가 함북 성진인 만큼 기질조차 씩씩한 북도의 기품을 타고나 어디로 보든지 튼튼하고 믿음성 있는 청년으로 보인다.” (《철필》 1931년 2월호)

김기림은 “노는 자리에는 유쾌한 면모를,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즐겁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을 과장하거나 자신의 일을 엉뚱하게 포장하지 않았다. 정주 출신인 이석훈은 처음 김기림을 만나보고 놀랐다. 이지적이고 분석적이며 감성적인 그의 글에서 풍기는 김기림의 인상은 창백하고 연약한 성격의 문인기자의 풍모였다. 그러나 실제의 김기림은 그와는 달리 “북구적인 굵은 선과 축구감독 같은 스타일”의 풍모였다는 것이다. 어쩐지 글쟁이로서의 인간형과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었다. 근심, 우울, 센티멘털리즘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명랑성과 그 이면에 “가만히 흐르는 나이브한(순진한) 성품의 감각”이 김기림을 매력 있는 인간으로 기억되게 했다.

김기림은 무엇이든 시험을 쳐서 되는 일이라면 자신 있다는 태도였다. 수재형이었다. 그는 조선일보 공채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고 “만약 종로의 보신각에 불이 났다면 어떻게 기사를 쓰겠느냐는 문제가 나왔는데, 그때 내가 쓴 답이 맞은 모양이지” 하면서 유쾌한 웃음을 웃었다(《김기림 평전》). 《철필》은 그를 소개하면서 “신문계에는 초보이면서도 외근 구역으로 가장 까다로운 종로서를 맡아 맹렬히 활동하고 있고 앞날의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고 했다. 김기림은 종로경찰서 외에도 동대문서와 각 사회단체를 출입하였고 각 사건 현장에 특파돼 필명을 날렸다.

그가 공채기자가 된 후 처음 특파원으로 간 곳은 간도 5·30 폭동 현장이었다. 그곳을 취재하고 그는 <간도기행>을 남기는데 이 글에서 민족주의적이고 지식인다운 현실 감각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간도기행> 11편에는 검열에 걸려 연판이 삭제된 흔적이 있다. 문학사 기술에서 ‘모더니스트’로 평가되는 측면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젊고 패기만만하면서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기자 김기림의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다.

“우리는 돌아간다.―포학한 자연의 학대 속에 그러고 무지한 중국인의 압박과 탄환 속에 동만에 산재한 백만의 형제를 남기고―(중략) 잘 잇거라 해란강아― 용정 시민 제군 건재하여라―청춘의 피를 불이는―그러고 그들의 영광스러운 ‘죽엄’을 유혹하는 광야여 너의 달콤한 속삭임하고도 작별하자. 조국에서 ‘일’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중략) 떠날 때 만개하엿든 뜰 앞에 한 포기 월계화의 ‘영광’도 한 떨기 꽃송이도 남기지 않고 무참히도 시들었다. 뜰 위에 이리저리 흩어진 꽃잎새의 시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홀홀한 용정에의 여행을 회고한다.“(조선일보 1930년 6월 20일자)

김기림은 서양 문예에 대한 깊고 폭넓은 시각으로 모더니즘 시론이나 문학이론, 비평, 수필, 시 등을 발표하면서 학예면의 중요한 필진이 됐다. 시인이자 수필가, 시론가로 김기림이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글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글쟁이로서의 김기림의 욕심은 소설에까지 월경(越境)해서 <번영기(繁榮期)>(조선일보 1935년 11월 1~13일자), <철도연선(鐵道沿線)>(《조광》 1935년 12월~1936년 1월호) 같은 소설을 남겼다.

그는 1936년 4월 조선일보를 휴직하고 일본 동북제대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무엇이든 시험만 치면 되었던” 김기림은 와세다대학 영문학부에도 합격했지만 동북제대를 택했다. 김기림은 회사에 사표를 냈지만 방응모 사장은 휴직 처리하고 학비를 장학회(서중회)에서 보조해 주도록 했다. 김기림이 일생동안 금전적인 보조를 받은 일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방응모의 김기림에 대한 인상은 학구적인 면과 지적인 면이 결합된 것이었다. 장학 사업과 인재 양성, 그리고 그 인재들을 신문사에 끌어 오는 ‘방응모식 인재 등용술’ 원칙에 김기림은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김기림은 1938년 경성으로 돌아왔다.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에서 교수로 초빙했지만 조선일보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었던 그는 복직해 학예부 차석을 거쳐 1940년 학예부장이 됐다. 학비 보조를 받은 것이 마음의 짐이 되기도 했을 테지만 학문 연구자나 문학가로서의 길 못지않게 신문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중요성을 간파했던 것이 기자라는 직업을 다시 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신문 학예면에 학술 논문과 비평이 실릴 정도로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서로 장단점을 보충하고 있던 당시 언론의 성격도 김기림의 선택을 도왔을 것이다.

문우 박태원은 김기림의 귀경을 소리 높여 축하했다. “돌아오셨으니 반갑소. 오랜만에 서울 거리를 함께 거닙시다. 술은 배우셨소? 당신의 <철도연선>은 나와 함께, 죽은 이상이도 매우 좋게 본 작품이었는데, 그 뒤로 다시 창작 활동이 없는 것은 술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인가 하오.”(《여성》 1939년 5월호)

김기림을 비롯한 문인기자들은 일제 말기로 접어들면서 우리말로 된 문학을 발표하기는커녕 일상적인 차원에서조차 조선어를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조선어 잡지들도 줄줄이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서서히 폐간되었다.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김기림은 경성에서의 모든 것을 접고 함북 경성으로 들어갔다. 환멸과 분노와 우울이 그의 내면을 지배했을 것이다. 함북 경성중학에서 김기림은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어린 학생들의 눈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유명한 시인이 시골학교 교사로 온 것이 의아하게 보였던 보양이다. 당시 학생 중에는 훗날 시인이 된 김규동과 영화감독이 된 신상옥이 있었다. 어느 날 김규동이 “저, 선생님 같으신 분이 왜 여기 내려오셨어요?”라고 물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시인 선생은 하늘에 허한 눈길을 주며 답했다. “조용히 혼자 울 곳을 찾아왔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외출 시에는 단정하게 정장을 하고 꼿꼿한 걸음으로 멀리 앞을 내다보며 스포티한 걸음으로 “영국 신사처럼 걷던 훤칠한 키의 스승”으로 제자들에게 기억되던 김기림은 그렇게 경성을, 조선일보를 떠나갔다. 그가 남긴 시 <청동>의 한 구절처럼, “도도히 흘러온 먼 세월”이 “가지가지 향기를 피우는”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그런 청동 그릇 하나를 그는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폐간 이후 김기림의 글은 《여성》 《조광》 등에 간간이 보이다가 1942년 《춘추》지 7월호에 <청동> <분원유기>를 끝으로 사라졌다.

광복이 되자 김기림은 서울로 돌아와 임화가 주도해서 조직한 좌파 문학단체 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시부(詩部) 위원장을 맡아 해방 공간의 여느 지식인들처럼 정치적인 삶에 뛰어들었다. 기자가 아니었으면 학자가 되기에 적합했던 김기림으로서는 어쩐지 ‘과한 활동’ 이었다. 그는 좌익 통신사인 공립통신의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공간에서 좌파 문인들의 월북 회오리가 거세게 몰아쳤고 종로 뒷골목에는 월북 문인들이 남기고 간 전단이 나뒹굴었다. 김기림은 고독하고 적막했다. 이제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은 지친 정신을 뉘일 글의 곳간이었다.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에서 강의를 맡기로 돼 있었다. “공연히 바람 부는 거리를 헤매면서 허송세월을 산 셈이지요. 이제부턴 대학에 들어앉아서 착실하게 내게 알맞은 일에 마음을 담아봐야겠어요.” (《김기림 평전》)

그러나 6·25가 터지자 좌파 문학활동과의 끈질긴 인연은 결국 그의 납북으로 이어졌다. 납북 이후 그의 행적은 묘연하다. 남한에서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단행되었을 때 김기림도 해금됐다. 그가 조선일보에 발표한 수많은 시, 수필, 시론 등도 그때서야 자유롭게 읽힐 수 있었다. 김기림이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남긴 많은 글들은 한 시대의 지성의 성채(城砦)로서 기억되고 보존될 것이다.

배짱 두둑한 ‘무관(無冠)의 여제(女帝)’
최은희 190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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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일본여대 3학년생 최은희는 1924년 여름방학을 맞아 춘원 이광수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과 가까운 사이였다. 최은희는 산부인과 의사인 허영숙으로부터 한 부호가 진료비를 여러 달째 주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최은희는 해결사를 자청했다. 이튿날 아침 진료비 85원 10전을 떼먹은 이 부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주인이 출타 중이라는 말을 들은 그는 마루에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냉면을 배달시켜 먹고 낮잠을 잤다. 오후에 돌아온 주인은 줄 만한 돈이라면 벌써 주었을 것이라며 ‘엉뚱한 돈’을 강요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떼를 썼다. 최은희는 “의료 규정을 알아보시고 부당하거든 고소하세요”라고 쏘아 주고는 말문을 닫았다.

주인은 초조해 하더니 타협을 시도했다. 처음엔 50원만 받아 가라더니 60원, 70원까지 올렸다. 최은희는 “내가 종일 이 집에서 치마에 묻힌 먼지는 털고 갈망정 단돈 10전도 깎아드리지 못 하겠소”라고 했다. 결국 그는 에누리 없는 85원 10전을 받은 뒤 치마를 털고 일어섰다.

때마침 조선일보는 ‘부인 기자’를 구하고 있었다. 당시는 기혼 미혼 여부와는 상관없이 여기자를 모두 부인 기자라고 불렀다. 1920년 7월 매일신보가 일본식으로 ‘부인 기자’ 채용 공고를 내면서 “가장(家長) 있는 부인”을 지원 자격으로 정한 데서 유래됐다. 편집고문 이상협은 이광수로부터 최은희를 추천받았다. 이광수는 그가 진료비를 받아낸 일화를 들려주면서 “그만한 배짱과 수완이면 넉넉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아내와 편지 왕래하는 것을 보니까 문장은 신문 기사 쓰기에 오히려 넘치는 정도”라는 칭찬도 곁들였다. 동경 유학 시절 최은희를 본 적이 있는 편집국장 민태원도 “활발하고 붙임성이 있어 제 구실을 할 것 같다”고 거들었다.

1924년 10월 최은희는 대학 졸업장을 포기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입사하자마자 그는 ‘부인견학단’을 수행하며 기사를 썼다. 부인견학단은 미혼여성과 주부들을 모아 은행, 공장 등 주요 시설을 견학하는 행사였다.

최은희는 금세 조선일보의 스타 기자가 됐다. 이름과 얼굴을 알리게 된 계기는 ‘변장 탐방’ 출동이었다. 그가 출동하던 날 조선일보는 “이번에는 특별히 부인 기자가 신출귀몰한 변장으로 대담히 출동하기로 하였습니다” 하고 독자의 흥미를 유도했다. 이날 아침 수표동 조선일보 사옥 앞은 그의 얼굴을 미리 보아 두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그는 “땟국물이 시커먼” 행랑어멈의 옷을 빌려 입고 서대문으로 출동했다. 한살배기 아기를 들쳐 업고 무청까지 한아름 안은 채였다. 그는 무교동, 광화문, 청진동, 종로 등을 거쳐 끝까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신문사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은 “설마 저렇게 차렸을 줄이야 누가 알았담” “나도 어린애 업은 사람을 퍽 주의해 보았지만 저렇게 반거지 같은 사람은 안 보았지”라며 탄식했다.

1925년 7월 한강 유역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자 최은희는 조선여자청년회,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여성동우회 등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구호반을 조직하고 자동차에 ‘조선일보 부인구호반’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그는 기생들까지도 구호반원으로 규합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최은희는 6.10 만세운동 직전 경찰이 벌인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특종 보도했다. 1926년 6월 10일의 순종 황제 인산을 앞두고 일제는 대대적인 검속에 들어갔다. 6월 6일 저녁 최은희는 타사 기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종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종로경찰서 앞을 돌아 나가던 자동차에 미와 경부가 탄 것을 보고 그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종로서 고등계 주임이었던 미와는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짓으로 악명을 날렸다.

시계방에 들르겠다는 핑계를 대고 타사 기자들을 따돌린 후 최은희는 황급히 종로경찰서로 들어갔다. 경찰서의 분위기는 “계엄상태와 같이” 삼엄했다. 취조실을 기웃거리던 그는 김기전, 방정환, 차상찬 등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다. 이들은 모두 천도교가 발행하는 《개벽》지와 관계된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 길로 편집국장 민태원 집으로 달려가 대문을 두드렸다. 이튿날 <모 중대 사건 폭로>라는 제목이 달린 최은희의 특종기사가 사회면 톱을 장식했다. 이 기사는 “천도교 관계자, 주의자, 학생, 직공 등 80여 명을 체포” “밤중까지 무릇 10여 회에 전부 약 100명의 혐의자를 검거” 등의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로 최은희는 부사장 신석우로부터 상금을 받고 주필 안재홍, 편집국장 민태원 등 간부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는 “신석우 씨로부터 일약 ‘신문계의 패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의 찬사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최은희에 대해 “조선일보 최초 여기자로 각사 역대 여기자 중 제일 활동을 많이 하고 제일 성적을 많이 낸 분”이며 “그의 재필과 활완, 건각은 여간한 남자기자로는 앙망도 못할 것”(《개벽》 1935년 3월호)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3.1 운동 당시 16세이던 최은희는 경성여자고보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를 외쳤다.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 고향인 황해도 연백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만세 운동을 일으키다 재투옥됐다.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감했지만 이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아홉 차례 연행되거나 유치장 신세를 졌다.

그에게는 “말괄량이” “수염 난 여자” 등의 별명이 붙었다. 적극적이고 당찬 그의 성격을 두고 붙인 별명이지만 실제로 그의 코 밑에는 다소 수염이 나 있었던 것 같다. “유달리 기다란 그의 수염(남자면 수염이랄 것이 없지만 여자로는 비교적 길다)에는 구슬 같은 땀이 송송 나와”(《별건곤》 1927년 8월호) 라는 묘사가 있다.

그는 남자기자도 취재하기 힘든 매음굴, 거지굴 등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다. 여기자이기 때문에 유리한 점도 있었다. 최은희가 하는 일은 거의 모두 여성 최초의 일이 되었다. 1924년 12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무선전화 공개방송에서 사회를 보게 됨으로써 여성으로서는 물론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라디오 전파에 목소리를 실었다. 1925년 7월 대구에서 열린 남조선 여자 정구대회에서는 여성 최초로 시구를 했다. 1927년 12월에는 남자기자들을 제치고 여기자로는 처음 조선일보 비행사 신용인(신용욱의 개명 전 이름)의 비행기에 동승한 뒤 5회에 걸쳐 탑승기를 썼다.

그 자신도 여기자로서 누린 ‘특권’을 인정했다. 그는 “(당시) 여기자는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면서 “아무리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도 무사통과가 되었으며 외국 영사관이나 구황실, 옛날 중신들의 가정에서 연회가 있어 사장에게 초청장을 보낼 때에는 부인 기자에게도 반드시 초청장이 왔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야말로 “무관의 제왕 노릇을 톡톡히 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1928년 조선일보를 퇴사한 후 한동안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다. 1942년 남편이 타계한 뒤에는 바느질과 우표가게 운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삼남매를 키웠다. 그의 아들 이달순(수원대)과 두 딸 이미순(덕성여대), 이혜순(이화여대)은 모두 교수가 됐다.

광복 후 최은희는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1945년 9월 여권운동자클럽을 조직하고 1946년 5월 서울보건부인회 부회장을 맡았다. 1952년에는 대한여자국민당(당수 임영신) 서울시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타계하기 2년 전인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모금운동이 전개됐을 때 그는 조선일보에 100만원의 성금을 내놓았다. 투병 중이던 1983년 5월에는 5000만원을 조선일보에 기탁했다. 이때 최은희는 “한평생 언론 창달을 염원하고 기여하고자 한 꿈과 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충정”을 나타냈다. 조선일보는 그의 기탁금을 바탕으로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해 1984년부터 매년 뛰어난 활동을 한 여기자에게 수여하고 있다.

오만하고 고독한 ‘슬픈 사슴’
노천명 1912~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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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근무하던 최정희가 1937년 4월 30일자로 사임하고 그 자리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낸 시인 노천명(盧天命)이 5월 3일자로 입사했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노천명은 1935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처녀시 <내 청춘의 배는>을 동인지 《시원》 창간호(1935년 2월)에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기자가 되고 난 뒤 기자를 소재로 한 시 <호외>를 발표했다. 기자라는 직업이 그에게는 별로 좋게 생각되지 않았던 듯하다.

 

큰불이라도 나라 폭탄사건이라도 생겨라

외근(外勤)에서 들어오는 전화가

비상(非常)하기를 바라는 젊은 편집자

그는 잔인한 인간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되어버린 슬픈 기계다

(중략)

오늘은 또 저 붓끝이 몇 사람을 매장할테냐

젊은이 수기에 참회가 있는 날

그 날은 무서운 날일지도 모른다 (《조광》 1936년 9월호)

 

노천명은 훗날 “그럭저럭 한 10년 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하였고 신문사도 제법 옮겨 다녀 보았으나 여성에게 한해 이것은 화려한 직업은 못 되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도 처음에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문기자가 되기를 고집했다. 부모는 “여자가 신문기자를 하면 못쓴다. 시집을 갈 때도 데려가는 집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며 말렸지만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신문사(조선중앙일보)에 취직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처럼 아슬아슬한 붓끝 때문에 참회할 날이 올까 봐 두려웠던 것일까. 노천명은 기자 생활을 접고 용정, 북간도, 연길 등지를 여행했다. 조선일보 입사는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조선일보 출판부는 신문처럼 시간에 쫓기며 아슬아슬 펜대를 굴려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여러 문인들을 접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겸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노천명은 <여성> 편집을 맡았다. 그는 최정희, 모윤숙, 이선희 등 여류 문인들을 필진으로 끌어들여 <여성>을 여성 문단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도 쓰기 시작했다. 북간도 여행의 감흥을 담아 처녀시집 《산호림》을 출간한 것이 출판부 기자로 근무하던 1938년이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도 이 시집에 실렸다.

노천명은 여류 문인들을 규합해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을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강경애, 김말봉, 김오남, 이선희, 모윤숙, 박화성, 백신애, 장덕조, 최정희 등 당대를 풍미하던 여류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었다. 노천명은 이 책을 내기 위해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수필 <오월의 사정>에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더러 얼굴이 요새 못됐다는 인사”라며 “메모첩을 보면 날마다 나갈 일이 있고 저녁 때 집으로 발을 옮길 무렵이면 정말이지 몸이 괴롭다. 여성문화총서를 내보려고 힘에 부치는 것을 애를 쓰고 다니노라니 정신적으로 지친 것을 속일 수 없이 육체로 나타나는 모양이다”라고 토로했다.

노천명은 내성적인 성격에다 오만할 정도로 도도했다. 경제부 기자 김광섭은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시인 최하림에 따르면 노천명은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동료와 자주 트러블을 일으켰다. 다른 기자와 실랑이 끝에 자신의 옷이 찢어진 일이 있었는데 노천명은 똑같은 옷감으로 다시 옷을 해 오라고 버티며 몇 년 동안 화해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말이 없다가도 한순간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한 번 토라지면 다시는 화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신문사에서도 결벽스러울만큼 냉정했다. 남자 기자들과 비교적 스스럼없이 지냈던 최정희와는 달리 노천명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노천명은 “이 나라 남성들의 인색함과 완고함, 그 시멘트같이 굳어진 여성 무능력시 및 멸시의 관념은 어느 세월에나 청산이 될 것인지”라고 했다. 그는 시 <자화상>에서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대(竹)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라 했다.

이런 노천명이 1938년 조선일보 사원 ‘부수 확장 운동’에서 26부로 2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114부로 1위를 차지한 윤석중의 실적에는 턱없이 못 미쳤지만 다른 사람들이 대개 2~5부에 그친 것을 감안하면 내성적 성격인 그로서는 놀라운 실적이었다.

노천명은 남자들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최정희, 이선희, 모윤숙 등 여류 문인들과는 친하게 어울려 다녔다. 이들은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서로 찾고,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서로 찾았으며, 서로 찾지 못하는 때면 편지로써 마음을 서로 알렸다”고 한다. 노천명은 특히 최정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1·4후퇴 때 세간살림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도 최정희와 주고받은 편지는 꼭 안고 갔을 정도였다.

노천명의 냉정하고 도도한 성격은 오히려 남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모양이다. 조선일부 학예부장이자 시인인 김기림은 한때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 밤 노천명의 집을 찾아간 김기림은 밤늦도록 노천명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끝내 나오지 않자 발자국만 남기고 돌아갔다. 최정희는 “구두 발자국은 댓돌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나갔다”며 “김기림씨 하면 시보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고 회고했다.

정작 노천명은 보성전문 경제학 교수 김광진을 사랑했다. 노천명이 1938년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안톤 체홉 원작의 <앵화원>에서 주인공 라프네스카야의 딸인 아냐 역으로 출연했을 때였다. 김광진이 관객으로 와서 그에게 꽃다발을 전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김광진은 유부남이었지만 노천명은 혼수감을 마련하면서 결혼을 준비했다. 그러나 본처와 이혼할 작정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김광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노천명은 실연의 아픔을 안고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두 사람의 연애담은 유진오가 <이혼>이라는 소설로 작품화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후 김광진은 6·25 때 본처도 뒤로 하고, 가수로 활동하면서 방가로라는 다방을 운명하던 유명한 기생 왕수복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천명은 1939년 조선일보를 떠났다. 이후 조선문인보국회 활동을 하며 1942년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등의 시를 썼으며 1943년부터 매일신보 문화부에서 일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신문과 부녀신문사 등에서 일했다.

노천명은 6.25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공산군에게 붙들려 이른바 ‘부역 문인’ 노릇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서울이 수복된 후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이때 노천명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던 시인 김광섭에게 “거기 있으면서 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삼일절에 나가도록 하라”는 명령에 가까운 편지를 보냈다. 김광섭은 조선일보 출신으로 공보처 국장과 차장을 맡고 있던 이건혁, 이헌구와 함께 세 사람 명의로 노천명의 선처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썼다. 이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노천명은 1951년 4월 4일 출감했다. 노천명은 이후 ‘부역 사건’을 언급하는 사람과는 가차 없이 절교했다. 박종화 역시 6.25 이후 부역 문인 문제를 언급하는 바람에 노천명과 서로 등지는 사이가 되었다.

노천명의 원래 이름은 기선(基善)이었으나 6세 때 홍역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자 ‘하늘의 뜻으로 살아났다’해서 ‘천명(天命)’으로 개명했다. 1957년 <이화 70년사>를 쓰던 중 뇌빈혈로 쓰러져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순결한 미남, 떠도는 방랑벽
백석 1912~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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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통이 갑자기 훤해진다. 녹두빛 양복의 단추를 열어젖히고 검은 물결의 머리를 휘날리며 광화문 네거리를 한 청년이 지나간다. 시인 백석(白石)이다.

“그가 지나가는 광화문은 잠시 식민지의 우울한 네거리에서 예술과 지적 교양이 넘쳐나는 낭만의 거리,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변하는 듯하다”(조선일보 1936년 1월 29일자)고 김기림은 썼다.

백석이 미남에다 멋쟁이였다는 증언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숨찰 정도다. 그 중에서도 백석과 조선일보 동료이면서 한때 연적 관계였던 신현중의 회고가 압권이다.

“백석은 그 처녀시집의 이름 그대로 ‘사슴’과 같은 시인이다. 새까만 머리털이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구실구실 숱이 많아 우선 보기 좋다. 웃눈썹 역시 새까맣고 숱이 많고 약간 꾸불거리면서 기운차게 가로 툭하게 긋겨 있고 속눈썹 길게 자란 그 큰 눈이 이글이글 아름답다. 약간 높은 코가 잔등선이 부드럽게 내려와서 변두리가 도톰하게 살져서 정말 잘생겼다. 구태여 흠잡으려면 이마가 조금 좁은 것, 목이 긴 것뿐이다. 키도 중키 이상이요 어깨며 다리며 균형된 체격이어서 그 사치한 입성으로 세종로를 걸아 갈라치면 참 멋이 줄줄 흐르는 당대의 미청년이었다.” (<서울 문단의 회상>)

그래서 일반인은 물론이고 “조선일보 사내에 있던 최정희 노천명 등 여류 문인들이 백석을 얼마나 좋아하고 가까이하려 애썼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이다. 백석은 호사스럽고 결벽증 심한 ‘사슴’이었다. 이어지는 신현중의 이야기다.

“그때 우리는 30~40원 정도의 양복을 입고 다녔는데 백석은 200원 들였다는 연두빛깔 ‘떠불 버튼’을 입고 다녔다. 양말 한 켤레가 이삼십전 하던 땐데 일원 이원짜리 양말을 신고 다녔다. 그와 길을 거닐다가 점심때가 되면 큰 걱정이었다. 나는 설렁탕이나 대구탕 한 그릇이면 그만인데 그는 그런 음식점에는 들어가기를 싫어했다. 깨끔하지 않다는 것이겠지마는 그가 갈 수 있는 깨끗하고 먹음직한 곳으로 가려면 나의 호주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지저분하고 궂은 것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전화 받을 때를 보면 그만이다. 뭇 사람이 손과 귀와 입을 대던 것이라고 해서 으레 수화기는 손수건으로 싸서 쥐고 귀와 입에 수화기를 대지 않고 조금 떼어서 들고 받는 것이었다.”(<서울 문단의 회상>)

백석이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 비서실에 근무하던 시절, 사장 집에 드나들면서도 그의 결벽증은 호사를 넘고 치기를 넘어 허영에 가까운 경지로 나타났다. 그가 찾아오면 안주인은 그가 기거하는 방에 향수를 뿌려주어야 했고, 이불 홑청을 갈아주어야 했다.

이런 백석이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가 소설가이자 또한 조선일보 기자(1936년 4월~1937년 8월)였던 허준이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신현중이 본 허준은 “사흘 나흘 낯을 씻지 않고 컴컴하고 지저분한 방안에 때 묻은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람이었다. 백석은 이런 허준에게 ‘눈물과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붙여 주었다. 이 게으른 소설가가 아내에게는 해진 옷을 입히고 어린 것에게는 엿 한 가락을 아끼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선 사람에게는 수 백냥 돈을 거저 주는 인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백석은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1935년 12월 한정판으로 시집 《사슴》 100부를 찍었다. 정가 2원이었다. 당시 신석정의 시집 《촛불》이 1원 20전, 오장환의 《성벽》이 1원이었다. 《사슴》은 비교적 비싼 가격임에도 애장용 도서로 인기를 끌었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구할 수 없어 손으로 베껴 소중하게 간직했다. 웬만한 시집은 모두 모았던 당시의 문학소년 양호민도 《사슴》만은 구할 수 없어 애를 태웠다.

백석과 조선일보의 인연은 넓고 깊다. 백석의 아버지 백영옥은 초창기 조선일보 사진부 주임을 지내다 뒤에는 촉탁으로 영업국 감독으로 옮겨 1939년 64세까지 근무했다. 백석의 고향은 방응모와 같은 평북 정주다. 정주는 민족의 시인 김소월(金素月)의 고향이며 근대문학의 길을 개척한 이광수의 고향이기도 하다.

백석의 공식적인 문단 활동은 19세 되던 해인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 해에 그는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아오야마(靑山)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영문학을 전공했다. 1934년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백석은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는 한편 조선일보 지면에 외국 문학작품과 논문 등을 번역해 실었다. 그리고 1935년에는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 본격적으로 시단에 등장하게 된다.

백석의 인생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에 절정을 맞지만 그는 이 호사를 마다하고 1936년 기자 생활을 그만둔다. 끊을 수 없는 방랑벽 때문이었다.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일본인들의 영어 발음에 익숙해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가진 백석의 인기는 대단했다. 서양 선교사들과 비교해도 백석의 영어 강의는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함흥 시절은 고달팠다. 월급 자체가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머리와 옷치장에 여전히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고 집안의 생계를 꾸려가야 할 의무감과 중압감이 작용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그의 하숙집을 찾아가면 그는 “배고파, 배고파” 하며 허기에 지친 얼굴을 했다. 유난히 음식과 관련한 시가 많은 이유도 궁핍했던 그의 현실과 관련 있을 것이다.

당시 함흥에는 조선일보 함흥지국을 경영했고 기자도 했던 소설가 한설야가 있었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면서 반(反)감상주의자인 한설야와 낭만주의자인 백석이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한설야는 훗날 백석이 만주로 떠난 후 그 빈자리를 메울 길 없어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토해내기도 했다.

백석은 함흥에 있는 동안 자야(子夜)와 열애에 빠져들었다. 자야는 훗날 서울에서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다가 이를 기증해 길상사로 만들고 백석문학상을 설립했다.

백석은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뿐 아니라 미술교사, 문예반 교사, 축구부 교사로 학생들의 특별활동을 지도했다. 1936년 늦가을이었다. 함흥은 추위가 빨리 찾아왔다. 교정에 낙엽이 깔리고 백석은 수업 시간 중에도 가끔 고개를 들어 창밖의 지는 나뭇잎을 바라보곤 했다. 기독교 학교였던 영생고보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늦가을부터 공연 연습에 들어갔다. 축제의 마지막 순서는 연극 공연이었다. 백석은 총감독을 맡아 작품 선정과 번역, 대본의 각색까지 혼자 힘으로 했다. 이 자리에 백석의 초청으로 안석주가 나타났다. 조선일보에서 함께 일하다가 영화감독으로 나선 동료였다. 학생들은 유명 화가이자 연극-영화감독인 안석주가 지방 변두리 학교의 연극을 지도하기 위해 달려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닌 두 사람의 지도로 학생들의 연극 시간은 행복했을 것이다.

백석은 1939년 1월 다시 조선일보 출판부로 돌아와 노자영의 뒤를 이어 《여성》의 편집을 담당하게 됐다. 그가 편집을 맡으면서 《여성》은 필진의 구성이나 글의 성격이 혁신되었다. 앙케이트 수준의 읽을거리 위주였던 이전에 비해 백석이 편집한 4월호는 분명한 색채를 띠었다. 여전히 흥미 중심의 읽을거리와 여성지 특유의 소품적인 글이 실리기도 했지만 영화, 음악, 문학 전반에 대한 백석 특유의 관심과 취향이 편집에 그대로 반영됐다. 정주 오산학교 시절 그의 선배이자 민족시인인 김소월의 유고시를 발굴해 싣기도 했다. 많은 주변 친구들을 끌어들여 잡지 필진으로 등장시켰으며 화려하면서도 품격 있는 여성 잡지를 간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백석이 맡은 《여성》은 발매 3일 만에 동이 나서 독자들의 추가 주문이 잇따랐다.

1939년 1월 27일 함흥 성천강 가에서 한 청년이 처녀를 칼로 찌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조선일보 함흥지국을 경영하고 있던 소설가 한설야의 장녀 녹손(錄孫)이었다. 한녹손은 함흥 영생고녀를 나와 이화여전에서 공부하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학가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가해 청년은 현직 군수의 아들이었다. 이 사건은 엄청난 화제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설야는 사건이 일어난 지 20일쯤 지난 2월 13일 딸의 병실에서 <아비의 심경>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백석은 이 글을 《여성》 4월호에 실었다. 칼에 찔린 딸의 상처에서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걸 보면서 한설야는 “그 아비 된 자의 심정은 새까맣게 다 타들어가 버릴” 지경이었다고 썼다.

백석의 기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설야의 애절한 글 뒤에는 같은 카프의 동지이자 평론가인 한효의 냉철한 분석적인 글이 붙었다. <태풍에 휩쓸린 처녀>라는 제목은 저널리스틱하면서도 시적이었다. 사건이 워낙 크고 심각한 것이다 보니 세간에 흉흉해진 소문을 바로잡고 이 사건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편집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기획이다. 한효의 글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장 배경과 심리 상태 등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했다. 그의 글은 근대와 전근대, 합리와 비합리 사이의 과도기에 처해 끙끙 앓고 있던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병리학적 진단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이 기획은 여성 잡지가 단지 특이한 사건의 흥미성, 일회성,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기사를 싣는다는 세간의 평을 뒤집었다.

백석은 10개월 만에 다시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만주로 향했다. 이후 광복의 날까지 그는 만주벌판에서 측량기사 보조원, 소작인, 광부 등을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주옥같은 시들을 토해냈다. 광복 후 평양에서 조만식의 영어-러시아어 통역비서로 일하기도 했던 백석은 ‘재북(在北)’ 또는 ‘월북’ 시인이 돼 한동안 우리에게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는 1996년 85세까지 북한의 협동농장에서 생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난기 심한 <상록수>의 작가
심훈 1901~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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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沈熏, 본명 심대섭 沈大燮)의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는 조선일보와 문자보급운동을 소재로 한 것이다. 소설은 문자보급운동에 참가했던 학생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ㅇㅇ일보사’ 대강당에서 열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여기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

심훈이 이 운동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것은 그 자신이 조선일보 기자로서 문자보급운동의 전 과정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심훈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고, 이 기간은 조선일보가 문자보급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던 때였다. 그는 기자를 그만둔 1932년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상록수>를 써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소설에 당선됐다. 동아일보는 그가 1924년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심훈은 소설, 시, 시나리오, 수필, 평론 등 거의 모든 분야의 글을 쓰는 전방위 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의 상대역인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이기도 했다. 한때 영화감독도 했다. 다재다능하기로는 배우이자 화가이며 영화에도 손을 댄 조선일보 학예부장 안석주와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가 있었다.

심훈은 1927년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각색한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감독했다. 원래 제목은 <어둠에서 어둠으로>였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어둠’이라는 말이 조선의 처지를 암시한다는 이유로 당국의 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촬영기술도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 스토리가 더욱 문제이올시다. (중략) 그 영화의 내용에 대하여서는 나는 이 땅에서 나고 또 살아온 사람인 고로 우리 조선의 현실을 조금아치라도 나타내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믿어 주십시오.”(조선일보 1927년 9월 3일자)

<먼동이 틀 때>에 대해 안석주는 “우리가 모든 조선 영화를 (불)살러 버린다면 이 영화를 남겨 놓는 데에 과히 부끄럽지 않다”(조선일보 1929년 1월 27일자)고 극찬했다. 당시 영화평론가 서광제는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촬영과 카메라워크에 있어서도 조선에서 그 이상 갈 작품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심훈의 영화를 극찬한 안석주는 다른 영화감독들로부터 항의를 받아 3일 후 “<먼동이 틀 때>에 대한 문구는 비록 인상기라 할지라도 다른 모든 영화에 대해 영향이 있을 것을 염려하야 이에 취소한다”(조선일보 1929년 1월 30일자)고 써야 했다.

3000원의 제작비를 들인 <먼동이 틀 때>는 단성사에서 상영되어 5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1926년 개봉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1200원의 제작비로 15만 명의 관객을 모은 것과 비교하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먼동이 틀 때>를 첫 작품으로 선택한 계림영화사는 이후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파산했다.

영화에서 성공하지 못한 심훈은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입사 후 영화감독과 배우의 경험을 살려 서구와 조선의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기사를 활발하게 썼다. 조선일보의 영화 담당 기자였던 셈이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 막 설립되고 있는 영화제작사(프로덕션)에 대해 “프로덕션은 본시 그 의의가 한 개인이 책임을 지고 독립해서 작품을 제작하는 부분적 집단”이라면서 “(조선에서는) 흥행사의 조종을 받고 돈에 먼저 눈을 뜨는 경영자의 지배 하에서 (……) 과연 뛰어난 작품이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자못 의문이다”(조선일보 1928년 4월 18일자)라고 썼다.

1929년 1월 심훈은 <조선영화 총관>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에 영화가 수입된 1897년부터 1928년까지의 영화사를 정리하기도 했다. 그는 틈틈이 시와 소설을 지면에 발표하면서 <성숙의 가을과 조선의 영화계> <소비에트 영화 ‘산송장’ 시사평> <조선 영화의 재건 방책> 등의 영화 기사를 쏟아냈다.

검은 테 로이드 안경을 쓴 잘생긴 얼굴로 엄숙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심훈은 장난이 매우 심했다. 그와 자취 생활을 함께 했던 윤석중이 기억하는 일화다.

어느 날 심훈은 동갑내기 동료인 안석주와 같이 길을 걸어가다 앞에 가는 일본 순경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일본 순경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으나 점잖은 양복 차림의 두 신사만 보일 뿐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 가다가 또 그러고 또 그러고 했으나 어찌나 동작이 날쌘지 일본 순경은 끝내 그를 잡지 못했다.

심훈이 술에 취해 종로 네거리를 지나다 파출소 앞에 나와 있는 순경의 모자를 슬쩍 벗겨 들고서 줄행랑을 친 일도 있었다. 얼굴이 하얘진 순경은 “모자 내 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뒤를 쫓았다. 심훈은 모자를 들고 여기저기 도망치다 결국 순경이 싹싹 빌자 돌려주었다. 그는 이 일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윤석중은 “일본 사람을 힘으로 이길 수는 없으니까 이런 짓으로 골탕을 먹이며 분통을 푸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동료 기자들도 그의 장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아일보 체육기자 이길용은 키가 작았는데 하루는 심훈이 그의 뒤를 따라가다 모자를 훌렁 벗기고는 “모자만 걸어가는 줄 알았더니 그 밑에 사람이 있었구먼” 하면서 놀렸다. 조선일보의 여기자 윤성상도 그의 장난에 시달렸다.

기자를 그만둔 뒤 어느 날 심훈이 권투경기를 보러 갔다. 그는 로이드 안경을 쓰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입구로 점잖게 들어갔다. 검표원이 “표, 표” 하면서 손을 내밀자 심훈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배우이기도 했던 심훈은 ‘네가 나를 못 알아보는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검표원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어서 들어가라고 했다. 당시 기자들은 무료입장이 가능했다. 그는 기자를 그만둔 뒤에도 가장 ‘기자다운’ 행세를 한 것이다.

그가 공짜로 입장한 권투경기는 살인 복서 ‘보비’와 일본 선수의 경기였다. 보비는 일본 선수 한 사람을 죽인 전력이 있어 당시 관중들은 ‘살인’ 선수보다는 상대인 일본 선수를 응원했다. 하지만 심훈은 열렬히 보비를 응원했다. 윤석중은 “일본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기에 ‘살인’ 보비 편을 들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심훈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인 1930년 3월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썼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그는 또 조선일보 기자 때 《철필》에 시 <필경(筆耕)>을 발표, 기자의 사명을 되새겼다.

 

한 시간에도 몇 만 장이나 박혀 돌리는 활자의 위력은

민중의 맥박을 이어주는 우리의 혈압(血壓)이다!

오오 붓을 잡은 자야 위대한 심장의 파수병이여!

 

심훈은 “1년에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체증 한 번 안 나는 매우 건강한 몸”(《신동아》 1934년 3월호)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지만 <상록수>를 발표한 이듬해인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35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하던 해 태어난 아들 심재호는 동아일보(《신동아》) 기자를 지낸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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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주 1901~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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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한 석영 안석주는 그야말로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문기자이면서 화가였고 가수이자 연극배우였으며 소설가이자 시인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었다. 조용만의 말처럼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 노래 잘 부르는 무소불능의 재인”이었다.

안석주는 먼저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22세 때인 1923년 최초의 신극단체인 토월회의 연극 <부활>에서 남자 주인공 네플류도프 공작 역을 맡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 생긴 외모에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카추샤 역을 맡은 여배우 이월화와 함께 부른 “카추샤 애처롭다 이별하기 서러워”라는 노래는 장안의 유행곡이 됐다.

안석주는 1927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후 시를 쓰기도 하고, <청충홍충>(1929년), <성군>(1932년), <춘풍>(1935년), <복순이>(1935년), <월파선생>(1936년), <아카시아>(1936년) 등 연재소설을 잇달아 선보이며 소설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이중 <춘풍>은 영화감독 박기채가 영화로 만들어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안석주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직접 영화를 제작했다.

<우리 소원은 통일>의 작사가도 안석주다. 이 노래는 그가 쓴 가사에 그의 장남 안병원이 곡을 붙여 만들었다. 안석주가 일제강점기 때 지은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안석주의 진가는 무엇보다 신문에 그린 만화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한편 세태를 풍자하는 글에 만화를 곁들인 ‘만문만화(漫文漫畵)’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당대에도 그의 재능은 만화에서 가장 돋보인다는 평이었다. 《별건곤》(1930년 11월호)은 “석영 안석주 씨가 소설이나 시, 영화 각본까지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지 말고 만화 방면으로 전력을 하였으면 그의 특재를 더 발휘할 것”이라 평했다. 삽화만큼은 “이분(안석주)만치 그릴 후계가 있을 성싶지 않다”(《조광》 1936년 4월호)는 평가도 있었다.

안석주의 그림이 유명해진 것은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삽화를 그리면서부터였다. 안석주는 동아일보에 몸담고 있던 1925년 조선일보 노수현의 <멍텅구리>에 맞서 <허풍선이> <엉터리> 등 4단 만화를 그린 경력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임꺽정> 때부터였다.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석영(안석주의 호)이 옛날 풍속을 그리는 삽화는 처음이건만 어찌나 삽화를 잘 그렸던지 벽초(홍명희)의 소설도 걸작이지만 석영의 삽화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고들 하였다”(《신문평론》)고 했다. 이후 안석주는 이광수의 <여자의 일생>, 염상섭의 <삼대>, 이기영의 <고향>, 최상덕의 <승방비곡> 등 조선일보 연재소설에 연이어 삽화를 그리며 독보적인 자리를 구축했다. 안석주는 자신이 쓴 소설 <춘풍>에 직접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안석주는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미술을 시작했다. 재학 중에 ‘고려화회’를 조직하고 교사 고희동으로부터 서양화 수업을 받았다. 고보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혼고양화연구소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1921년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에서 만화를 배우고 휘문고보에 도화강사 미술교사로 취직했다.

그는 1922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신진작가 나도향의 <환희>에 삽화를 그리면서 신문에 데뷔했다. 안석주는 나도향과 함께 잡지 《백조》의 동인이었다. 안석주는 그 후 동아일보, 시대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조선일보로 옮긴 그는 본격적인 만문만화 시대를 열었다. 도시의 풍경과 세태를 재미있는 글로 풍자하면서 이를 단순화된 그림으로 보여주는 만문만화는 문예 장르의 하나로 인정받아 신춘문예에 포함되기도 했다. 1930년 조선일보는 신춘문예 모집 부문에 만문만화를 포함하면서 그 형식을 “1930년을 회고하거나 1931년의 전망이거나 시사 시대 풍조를 소재로 하되, 글은 1행 14자 50행 이내”라고 규정했다. 이후 최영수, 김규택, 임홍은 등의 작가들이 ‘만문만화’ 혹은 ‘만화만문’을 여러 신문과 잡지에 다투어 발표했다.

1930년대 조선은 식민지적 근대가 정착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모던(modern)’은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근대를 숭배하는 ‘모던 걸’ ‘모던 보이’ 들은 백화점에서 최첨단 기기인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며 “안 사도 좋을 것 같은 것들”을 구매하고 벚꽃 핀 창경원의 가설무대에서 “가리울데만 얄팍하게 가린 굵직굵직한 여자들의 다리춤”을 구경했다.

안석주가 보기에 그것은 왜곡된 근대였다. 산보에 나온 늙은 남자를 부착하며 자신이 지팡이가 되어주는 ‘스틱 걸’, 남자의 다리를 주물러 주거나 발을 씻겨 주는 ‘핸드 걸’, 돈 오십 전을 받고 남자에게 키스를 해주는 ‘키스걸’, 거리에서 하염없이 누군가의 유혹을 기다리는 ‘스트리트 걸’. 안석주가 본 ‘모던 걸’은 돈 몇 푼이면 무엇이든 하는 얼빠진 모습이었다. ‘모던 보이’들 역시 레인코트를 입고 연애시 문구나 외우며 폼을 재면서도 취직을 못 해 비틀거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유연애도 그의 풍자 대상이었다.

“요사이 보이는 게 지랄밖에 없지만 자동차 드라이브가 대유행이다. 탕남탕녀가 발광하다 못해 남산으로 용산으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러브씬’을 연출하는 것은 제 딴에는 흥겹겠지만 자동차 운전수의 ‘핸들’ 쥔 손이 어찌하여 부르르 떨리는 것을 알았는지.” (조선일보 1933년 2월 19일자)

재주뿐 아니라 잘생긴 외모 덕에 안석주는 꽤나 유명세를 탔다. 이선희는 안석주에 대해 “남자로서는 무던히 매끈한 살결과 곱살스런 얼굴”이며 “코는 마치 석고로 빚어 놓은 듯”하다고 평했다. 목소리는 그다지 좋지 못했던 듯하다. “음성은 깊고 좀 무거운 편”으로 “좀 힘들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편”이었다(《조광》 1936년 4월호). 이를 ‘맹꽁이 소리’로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누구나 오후 1시쯤 조선일보 편집국에 가서 시치미를 딱 떼고 ‘야, 맹꽁이!’하고 고성대호를 하여 보라. 반드시 시비할 사람이 있으니 그것은 누구이냐 하면 멀리서 들리는 맹꽁이 소리 같은 목소리에다가 가무잡잡한 ‘코방귀’ 소리를 곁들여 모신 석영 안석주 군일 것이다.” (《철필》 1930년 8월호)

안석주에게는 유명 연예인처럼 ‘팬들’이 따라다녔다. 여자전문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은 “선생님을 사모하옵는 정이 주야 끊일 줄 몰라 한 번 만나 뵈옵고저 하오니”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 동대문 전차정류장에서 만나달라고 했다. 안석주는 그곳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몰래 뒤따라온 사회부장 김기진과 소설가 최상덕이 “석영 만세!”하고 외치는 바람에 여학생이 도망쳐 “실패한 로맨스”가 되고 말았다(《조광》 1939년 6월호).

삽화를 그리는 신문기자의 삶은 고단했다. 소설가들은 마감 10분 전에 원고를 가져오기 일쑤였다. 짧은 시간에 그림을 그리려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연재소설 삽화뿐 아니라 신문과 잡지의 거의 모든 그림이 안석주의 몫이었다. 게다가 학예면 편집도 담당했다. 그는 “10분 동안에 삽화를 그리게 되니까 잘 될 리가 있어야지요. 어쨌거나 현재 삽화가나 만화가들이 신문이나 소설가에게 매여 지내는 형편”이라고 한탄했다. 그는 “소설 삽화와 만화를 하루에도 몇 장씩 그리고 한 면 두 면의 편집까지 하고도 소위 수당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신문사 덕에 여행 한 번 해본 일도 없이 신문의 한 귀퉁이나마 새롭게 장식해 보려고 밤잠을 못 자고 애를 바둥바둥 쓰는 못난 사람”이라고 자신을 그렸다.

그러나 안석주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진 천상 신문기자였다. 그는 “신문사와 발을 끊고” 지내려다가도 “다시금 신문사에 끌려가게” 되었다. 신문기자는 단순한 직업 이상의 매력이 있었다. 그에게 신문기자란 “박사, 학사라도 신문기자의 소질이 없으면 급사로부터 승격이 된 사람에게 설움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능력 중심의 직업이며 “각 분야에 상식과 경험, 실력, 민감성” 등을 고루 갖추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는 “붓끝이 잘못 미끄러지면 생사람을 죽이는 수도 있고 죽을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거룩한” 일 앞에서 “먹기 위하여 개같이 벌 수는 없다”고 말했다.(《별건곤》 1934년 3월호).

안석주는 1935년 영화 <심청전>을 감독해 발표하고 1936년 8월 영화에 전념하기 위해 조선일보를 그만두었다. 1939년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했는데, 이 회사는 영화인에게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강요했다.

광복 후 안석주는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하고 전조선문필가협회, 조선극작가협회 등에 참여했다. 그는 중앙일보 고문, 민주일보 문화부장 등을 거쳐 1948년 문화시보 창간 사장을 지냈다. 이후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문교부 예술위원을 지내다 1950년 2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형제가 조선일보 기자였던 저항 시인
이육사 1904~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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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시인 이육사(李陸史)는 1930년 첫 시 <말(馬)>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1월 3일자 7면 하단에 1단으로 실린 10행의 짧은 시에서 그는 “채찍에 지친 말”이지만 새해에는 힘차게 소리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육사와 조선일보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시를 발표한 후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긴다. 1930년 대구 시내에 항일 격문을 뿌린 대구 격문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출옥한 직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 드나들던 시기였다.

당시 신문사 지국은 지방 취재본부의 역할을 겸했다. 지국 기자는 본사로부터 제대로 급여를 받지는 못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을 경우 본사 기자로 특채되기도 했다. 경제부장 정수일은 인천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본사로 특채된 경우였다.

이육사가 대구지국 기자로 조선일보 지면에 쓴 첫 기명 기사는 <대구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이다.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쓴 이 기사에서 그는 ‘육사생(肉瀉生)’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는 스포츠 기사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난’에 2회에 걸쳐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기사를 썼다. 이때는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우리 조상으로부터 그들의 자손인 우리들에게 전하여 온 국기(國伎)인 ‘장’을 소개했다. 장이란 ‘장치기’의 준말로 두 편으로 팀을 나눠 나무토막이나 공을 긴 막대기로 쳐 상대편의 문 안에 넣는 놀이다. 이육사는 이 놀이가 ”경기에 계산하는 용어까지도 순 조선 말로 한다“면서 ”세계의 농민대중에게 보급시키라“고 주문했다.

역시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신진작가 장혁주(張赫宙)군 방문기>(조선일보 1932년 3월 29일자)도 썼다. 장혁주는 1932년 일본어 소설 <아귀도(餓鬼道)>를 발표한 대구 출신의 소설가로, 그의 소설이 실린 《개조(改造)》 4월호는 하루 만에 절판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때 이육사가 대구에서 작가 장혁주를 인터뷰했다. 둘이 나란히 찍은 사진도 기사와 함께 실렸다.

인터뷰에서 이육사는 “어째서 일본문으로 쓰시게 되었습니까”라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장혁주는 “조선의 사정을 한번 알리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이육사는 장혁주에게 조선일보에 수필을 실어 줄 것을 부탁했다.

기자 이육사와 소설가 장혁주는 이후 반대의 길을 가게 된다. 이육사는 독립운동을 하다 1944년 북경 감옥에서 옥사했고, 장혁주는 친일(親日)문학의 길을 걸으며 일본어로 문학 활동을 한 조선인 중 가장 유명해져 6·25 후 일본으로 귀화했다. 이육사는 장혁주 인터뷰 기사를 쓴 직후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이육사가 다시 조선일보 기자가 된 것은 1934년 무렵이었다.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장 이상호의 배려로 조선일보 대구 특파원에 임명됐으나 부임 도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는 1935년 5월 경기도 경찰부 심문기록에서 “귀선(歸鮮, 조선으로 돌아옴) 후에는 죽은 이관용이 내 아우(이원조)의 장인이므로 그에 의탁하여 신문사에 입사운동을 했으나 잘되지 않았었다”면서 “그러는 중에 조선일보의 아는 사람 이상호에 의탁하여 조선일보 대구 특파원이 되어 부임 도중에 본정(本町)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종로경찰서에서도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고 밝혔다.

이육사가 이상호에게 취직을 부탁해 ‘특파원’이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는 지국 기자가 아니라 본사 기자 신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육사와 이상호는 1930년 중외일보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육사는 이후에도 조선일보에 꾸준히 글을 썼다. 그의 글은 1930년대 후반부터 폐간 직전인 1940년까지 조선일보 지면에 발표됐다. 5회에 걸쳐 쓴 <노신(魯迅)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을 비롯하여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계절의 오행>(1940년 4월 27일자) 등이다. 그는 또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인 1942년에는 《조광》 1월호에 수필 <계절의 표정>을 발표했다.

이후 이육사는 중국에서 활동했다. 1943년 그는 북경 중산공원에서 매일신보 북경 특파원 백철(白鐵)을 만났다. 백철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하고 있던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와도 가까웠다. 그때 이육사는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멋지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지만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1년 후 백철은 일제 경찰로부터 이육사의 행적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경찰은 일본어로 번역된 이육사의 시집 《청포도》를 내놓으며 “이육사는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오?”라면서 시집의 한 구절을 들어 “여기서 기다리는 귀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더불어 이원조에 대해서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육사가 북경에서 일경에 붙잡혀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옥사했다는 소식을 백철이 접한 것은 광복 후였다.

이육사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다. 첫째 원기, 둘째 원록(육사), 셋째 원일, 넷째 원조, 다섯째 원창, 여섯째 원홍이다. 그의 형제들은 저항정신이 투철해 1927년 대구 조선은행 폭탄 사건 때 첫째 원기부터 넷째 원조에 이르기까지 4형제가 모두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했다.

지금은 이육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1930년대엔 이원조가 더 유명했다. 이원조는 이육사가 조선일보에 작품을 발표하기 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2년 연속 시와 소설에서 당선한 문사였다. 이육사의 맏형 이원기의 장남인 이동영(전 부산대 교수)은 “당시 조선일보 기자이자 평론가인 이원조가 워낙 유명해서 육사는 이원조의 중형(仲兄)으로 소개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다섯째 이원창은 1940년 폐간 때까지 조선일보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인천 앞바다 도서(島嶼) 순례기>(조선일보 1940년 6월 9일자) 등의 기사를 남겼다. 그는 폐간호인 1940년 8월 11일자 석간 3면 지방 특파원 방담기사에서 “기자 생활 5년인데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라고 했다. 이원창은 광복 후 인천신문 창간에 참여해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1946년 5월 미군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필화를 겪기도 했다.

사회부 기자의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1902~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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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채만식(蔡萬植)은 1934년 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뒤 1936년 1월 퇴사할 때까지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했다. 그는 입사 직전까지만 해도 “채(만식)씨같이 조선에서 다작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이 쓰는 작가였다. 입사 직전 1년 반 동안 쓴 소설만 해도 장편(신문연재) 2편, 중편 1편, 단편 3편이었고 수필은 약 30편에 달했다. 소설가이자 평론자인 안회남은 채만식을 “남작가(濫作家, 작품을 남발하는 작가)”라 부르며 “그의 소설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고 한 개의 오락적 흥미 독물(讀物, 읽을거리)로 전락”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다작이라는 지적에 대해 채만식 스스로도 “아니야, 나는 과연 남작을 했지!” 라고 대꾸할 정도였다(조선일보 1933년 6월 28~29일자).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1934년은 그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 때였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1924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조선 문단에 득실득실한 치졸한 작가의 한 사람”이라는 혹평까지 들었으나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와 <레디메이드 인생>(1934) 등 2편의 소설을 잇달아 선보이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조선일보에 140회 연재한 그의 첫 장편소설 <인형의 집을 나와서>에 대해서는 독설가 안회남도 “전일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그는 단편소설이나 희곡보다는 장편소설에 보다 훌륭한 소질이 있다”고 칭찬했다. 신동아에 연재한 <레디메이드 인생> 역시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채만식은 1925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약 1년 간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고 1929년부터 약 4개월 간 개벽사 기자로 잡지를 만든 경험도 있었다.

그는 조선일보 입사 후 바쁘게 활동했다. 입사하자마자 함북 회령에서 “10여 마일(약 16km) 더 들어가는” 오지의 탄광으로 장기 출장을 떠났다. 당시 총독부는 만주와 두만강변 국경 지역으로 조선인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세워 우선 시범적으로 만주 요하 지역에 6000여 명, 관북 지역 탄광에 3800여 명을 이주시켰다.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전라-경상-충청도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일보는 조선인 집단 이민촌의 생활상을 신년호 특집기사로 싣기 위해 만주, 관북, 관서로 지역을 나눠 3명의 기자를 파견했다. 채만식은 관북 지역을 맡았고 만주 지역은 사회부 기자 김인이, 관서 지역은 평양 지국 기자 김만형이 담당했다. 채만식은 경성에서 회령까지 기차로 열여덟 시간, 자동차로 덜컹거리며 또 몇 시간, 꼬박 하루 걸려 유선탄광에 도착했다. 유선탄광은 “(신선이 논다는 뜻의 유선이라는) 이름이 좋지, 만일 정말로 신선이 정배(定配)라도 왔다면 얕으나마 가까운 두만강에 투신자살할 만큼 속되며 거칠며 살풍경한 곳”이었다. 5년 전 개발을 시작한 이 탄광에서 이주민들은 불면 날아갈 듯한 천막집과 양철지붕으로 만든 오막살이에서 “목이 마를 듯한 황량뿐”인 삶을 살고 있었다.

채만식은 이주민들의 고향과 숫자를 파악하고 음식, 노동, 풍토가 맞지 않아 탈출한 사람들도 있다고 상세히 보도했다.

“이 유선에는 맨 처음에 경남 함안 등 멧골로부터 99명이 왔었고 제2회로 53명이 왔는데 그 중 여자 즉 가족을 데리고 온 사람은 단 2명이요 전부가 독신자이다. 그리고 최근에 울릉도로부터 두 번에 나누어 독신자 25명과 가족 데린 109명이 왔다. 총수를 합하면 286명인데 그 가운데 경남 수재지에서 온 사람이 도착하던 수일 만에 18명이 탈주를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탈주한 원인은? 하고 물으니까 임금이 적은 것, 음식이 맞지 아니한 것, 기후가 추운 것, 그러한데다가 나진과 청진이 벌이가 좋다는 말을 듣고 벌이 좋은 곳을 찾아 갔다는 것이다.”(조선일보 1935년 1월 1일자)

1935년 8월에는 경남 통영 아래의 섬 욕지도에 파견됐다. 이곳의 멸치 어장과 문어 어장에 대한 르포 기사는 <생활해전 종군기>(조선일보 1935년 8월 10일~14일자)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는 채만식뿐 아니라 사회부 기자 김기림, 이종모, 성인기가 함께 참여해 만든 시리즈 기사였다. 김기림은 제주도 해녀들, 이종모는 평북 철산 대화도의 등대지기, 성인기는 강화도의 새우잡이와 민어잡이 어민들을 탐방하고 각각 4~5회에 걸쳐 르포기사를 연재했다. 채만식은 “성난 물결에서 혹은 천길 바다 밑에서 ‘밥을 구하는 어부들’의 피가 나도록 현실적인” 생활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채만식은 바쁜 기자 생활에 쫓겨 정작 소설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수필 나부랭이는 흥에 겨워 혹은 청에 졸려 잊었다가 생각난 것처럼 붓을 대었지만 창작에 이르러서는 작년(1934년) 6월 이래 단 한 편도 쓰지를 아니하였소―가 아니라 쓰지를 못 하였소”(조선일보 1935년 8월 31일자)라고 했다.

다작의 작가인 그가 작품을 내놓지 못하자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문에 채만식은 조선일보에 <소설 안 쓰는 변명>이란 글을 써 “현실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벅차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신문기자로 지낼 때는 심신이 다 같이 여유가 없다고 남은 속여도 나는 속이지 못할 구실을 구실 삼아 문학을 등한히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에게 문학은 절실했다. 그는 “노둔한 머리와 병약한 오척 단구를 통째로 내맡겨 성패간에 한바탕 문학이라는 자와 담판 씨름을 하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 병자년(1936년) 벽두, 마침 조선일보를 물러나오던 기회다”라고 회고했다(<자작안내>).

그는 "심한 신경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신경질 제3기“라고 했다. 안회남은 그의 신경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채만식)의 성격을 백분비율로 따져 보면 백퍼센트가 신경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 백퍼센트의 신경질을 다시 분석해 보면 우울 40퍼센트, 다정 20퍼센트, 넌센스 10퍼센트, 애교 10퍼센트, 증오 10퍼센트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것이다”(조선일보 1933년 6월 28일자)

삽화가 김규택은 그가 야채만 먹는다며 ‘채(采)만식(食)‘이라고 불렀다. 채만식은 “얼굴은 늘 창백한데다가 찬바람이 팽팽 도는 쓸쓸하고 쌀쌀한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안회남은 창백한 그를 지켜보고 있으면 “가엾은 생각까지 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회남은 “그에게 제국주의적 발악과 음모는 결단코 없다”며 “채씨와 처음 만나 그의 신경질과 우울한 표정에 고개를 홰홰 내두르고 달아난다면 반면 그의 따뜻한 성격을 알지 못하고 마는 것”이라 했다.

채만식은 작가를 지망하는 한 문학청년에게 <문학과 범재―C군에의 회신>이라는 공개서신을 띄워 천재가 아니면 문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내가 아는 범위의 군은 역시 범인이오. 천재라야 닦으면 닦을수록 빛이 나는 법이지 범인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애쓴 값으로 소성(小成)은 있을지언정 대성(大成)은 불가능하오. 무엇보다도 생리적으로 세포의 조직이 다른걸! (중략) C군, 문학을 버리오. 군 한 사람이 이미 손에 잡았던 문학을 버린댔자 세상은 왼눈도 깜짝하지 아니하오. 문단은 백이나 천의 범인 작가보다도 한 사람의 천재적 작가가 나오면 그만이오.” (조선일보 1935년 7월 18~19일자)

채만식은 밤새 글을 쓰고 낮에는 잠을 청하는 때가 많았다. 신경질적이고 야행성인 그가 “3년가량 전후 두 번의 신문기자”와 “3년가량의 잡지 편집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것은 그의 말대로 “기계적 노역”에 자신을 내맡긴 것이었다.

그는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나서야 문학적 성취를 더 이룰 수 있었다. 1936년 1월 퇴사 후 3년간은 그가 전 생애를 통해 가장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30편 가까운 소설을 쏟아냈다. 특히 1937년 10월부터 조선일보에 198회 연재한 장편소설 <탁류>와 1938년 1월부터 《조광》에 연재한 <태평천하>(원제 <천하태평춘>)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채만식 연구를 쓴 김홍기는 “신문기자의 호화롭고 분망한 생활에 빼앗겨 작품의 제작에 잠시의 공백기를 가져오게 하였으나 반면에 기자 생활은 시대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력을 키워 줌으로써 그 이후의 작가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채만식은 1940년대에 조선문인협회 회원으로 일제를 옹호하는 글을 다수 남겼고, 광복 후 <민족의 죄인>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반성했다. 1950년 6월 11일 폐질환으로 타계했다.

소설가로도 이름 날린 ‘조선일보 고정 필자’
한용운 1879~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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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님의 침묵>의 시인 한용운(韓龍雲)은 5편의 소설을 남긴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는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1일까지 모두 241회에 걸쳐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조선일보는 1935년 4월 2일자 <흑풍> 연재 예고에서 “《님의 침묵》이란 시집으로써 이미 시인으로서의 선생을 대하였거니와 금번 이 흑풍으로써 다시 소설가로서의 선생을 대하게 됩니다”라며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류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주문을 달았다. <흑풍>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신문 발행부수가 6000부 늘었고,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조선일보를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어 1938년 5월 18일부터 1939년 3월 12일까지 223회에 걸쳐 한용운의 소설 <박명(薄命)>이 학예면에 연재됐다. 한용운은 이 밖에도 소설 <죽음> <철혈미인> <후회>를 썼지만 <죽음>은 발표하지 않았고 <후회>는 조선중앙일보에서 연재하다 이 신문이 1936년 폐간됨에 따라 50회로 중단했다. <철혈미인> 역시 미발표 미완성 소설이었다. 결국 한용운이 생전에 발표해 완성한 소설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흑풍> <박명> 2편뿐이었다.

한용운이 조선일보 지면을 빛낸 것은 소설만이 아니었다. 그는 논설 <조선청년에게>(1929년 1월 1일자), 기행문 <명사십리행>(1929년 8월 14~24일자), 연작시 <심우장 산시>(1936년 4월 3~5일자), 수필 <심우장 만필>(1936년 3월 19~20일자) 등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조선일보 태평로사옥 낙성을 축하하며 “조선 사람의 문화 정도가 진보된 상징”(조선일보 1935년 7월 6일자)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한용운은 1939년 11월 1일부터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조선일보에 <삼국지>를 번역 연재했다. 아마도 이 시기 한용운은 웬만한 조선일보 기자보다 조선일보에 더 많은 글을 쓴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조선일보와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의 친분 때문이었다. 한용운은 태평로사옥 낙성 축사에서 “나는 방 사장이 많은 금전을 내어서 조선일보를 경영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와 같은 굉장한 건물이 번듯이 나타나게 됨에 따라 과연 그이는 거룩한 사업을 하는 훌륭한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교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 겸 경성지회장을 맡은 한용운은 역시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 조만식의 소개를 통해 방응모를 알게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1928년부터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던 홍명희의 소개로 한용운이 방응모와 알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1930년대 후반 한용운은 방응모의 죽첨정(현 충정로) 집에서 조만식, 홍명희와 함께 어울렸다. 방응모의 손자 방일영은 이렇게 회고했다.

“조만식 선생님이 (서울에) 올라와 계시면 저녁에 죽첨정 집에 홍명희, 한용운 씨들이 오셨다. 으레 네 분께서는 술상을 놓고 밤늦도록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셨다. 막연한 기억으로는 한용운 씨가 아주 말씀을 잘하셨던 것으로 안다. 재담과 농담을 아주 잘하셨고, 그래서 좌중의 화제를 도맡다시피 하셨던 것은 분명히 기억된다. 장손이었던 나는 언제나 조부의 옆쪽으로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말씀이 끝날 때까지 약주를 따라드려야 했다. 졸음을 쫓는 것은 말씀을 재미있게 잘하시는 한용운 씨의 유머러스한 재담이어서, 좌중을 웃기시곤 하였으나 나는 그 덕분에 졸다가 깨어나곤 했다.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재담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 하고 신기롭게 바라보곤 했다.” (《태평로 1가》)

일제의 호적조차 거부하며 빈한(貧寒)한 삶을 산 한용운에게 거처를 마련해 준 이도 방응모였다. 다섯 살 위의 한용운을 선생님이라 부른 방응모는 1933년 벽산 스님과 박광 등 한용운의 지인들과 함께 성북동 뒷산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주었다. 건축비의 대부분은 방응모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이때 한용운은 “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으니 집을 북향으로 지어 달라”고 주문했다.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에 따르면 한용운과 방응모는 심우장에서 바둑을 두며 시국을 걱정했고 홍명희와 셋이서 배천온천에 다녀올 정도로 절친했다. 한용운은 방응모의 회갑을 축하하는 한시를 써 그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삼가 계초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다(謹賀 啓礎先生 晬辰)>

 

서녘에서 온 기운 기이도 하여(西來一氣正堪奇)

비와 구름 그 조화 때를 알아라(䨱雨飜雲自有時)

서까래 같은 큰 붓 죽임과 살림이 달려 있고(大筆如椽能殺活)

대나무 같은 영재들은 또 얼마나 모인 것이랴(英才似竹又參差)

용을 잡고 호랑이 휘어잡기쯤 마음대로요(屠龍搏虎固任意)

학이나 갈매기와 벗할 날도 있으리 (訪鶴問鷗亦可期)

남산과 한강처럼 장수하기를 기원하며(祝壽南山漢水上)

따뜻한 봄 삼월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陽春三月足新禧)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됐을 때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란 한시에서 아픔을 이렇게 토로했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筆絶墨飛白日休)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銜枚人散古城秋)

한강물도 울음 삼켜 흐느끼며(漢江之水亦嗚咽)

연지(硯池)를 외면한 채 바다로 흐르느니!(不入硯池向海流)

 

1944년 봄 방응모는 인삼과 녹용이 든 한약을 세 차례 지어 보내기도 했지만 한용운은 이 해 6월 심우장에서 타계했다. 항년 66세였다.

<임꺽정> 애정 묘사로 ‘늦바람 선생’ 별명 얻어
홍명희 1888~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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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도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와 밀접한 관계였다. 그의 소설 <임꺽정>이 1928년부터 무려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10년 간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그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이 기간 동안 홍명희는 다른 신문에는 글을 쓰지 않았을 정도였다.

1920년대 중반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이기도 한 홍명희는 신간회가 창설된 1927년 무렵부터 조선일보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이 해 2월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나 극구 고사하고 실무직에 해당하는 조직부 총무간사의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신간회는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등 조선일보 간부진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이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 발행인 겸 주필인 안재홍이 홍명희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면서 “무엇이든 쓰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홍명희는 조선일보가 경영상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사장 물망에 올랐다. 1932년 만주 동포 구호의연금 유용 혐의로 사장 안재홍과 영업국장 이승복이 구속되었을 때 “후임 사장의 명망에 오른 이가 허헌, 홍명희, 유진태”(《삼천리》 1932년 5월호)였고, 방응모 인수 후에 “조선일보의 신사장은 최린, 허헌, 홍명희의 3씨 중에서 출마하리란 설”(《삼천리》 1933년 9월호)이 있었다.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는 조선일보 판매부장을 지냈고 장남 홍기문은 조사부장과 학예부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며 폐간 때까지 근무했다.

1933년 방응모 체제 이후 조선일보와 홍명희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홍명희는 한용운과 함께 방응모의 집에서 조선일보 사람들과 만나 교분을 나눴다. 홍명희와 방응모의 교류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홍명희가 1926년 조만식에 이어 정주 오산학교 교장을 지낼 때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운영하면서 금광개발에 뛰어든 지역 유지 방응모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홍명희는 자주 방응모의 죽첨정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람 이병기는 자신의 일기(1939년 3월 13일)에서 이때 정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맑다. 오후 4시 문일평 군을 찾다. 이병도 군이 와있다. 같이들 나서 죽첨정 방응모 씨 집을 가다. 한용운, 이중화 군은 와있다. 방종현, 이훈구, 함상훈도 있다. 추후하여 홍명희, 황의돈 군이 오다. 제주에서 가져왔다는 풍란과 한란이 있다. 난화(蘭話)를 한참 하였다. 2층으로 올라 술을 먹었다. 만해의 광장설과 벽초의 종용술이 재미스러웠다.”

홍명희는 방응모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 《조광》 1938년 11월호에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화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 이 시에서 홍명희는 자신보다 네 살 위인 방응모를 인형(仁兄)으로, 자신을 아우로 호칭했다. 1938년에는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전개한 향토문화조사사업에 홍명희는 편집위원 직책으로 문일평, 이병도, 황의돈, 방종현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홍명희는 유일한 소설 <임꺽정> 단 한 편으로 한국 근대문학사상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다. 조선 명종 때 백정 출신의 도적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다양한 토속적 어휘와 민속적 자료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풍부한 우리말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당대에도 “조선 어휘의 대언해(大言海)”(이효석), “조선어와 생명을 같이할 천하의 대기서(大奇書)”(이광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으로 쓰려고 했다. 그는 집필 동기와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지나(支那, 중국)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정조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양취(洋臭)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거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삼천리》 1933년 9월호)

<임꺽정>은 궁중비화 또는 권력투쟁을 담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소설과는 달리 민중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임꺽정은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전까지는 일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한 이유에 대해 “남들이 잘 모르니까 끌어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백정’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택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임꺽정이란 지난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백정 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 ○○(혁명 또는 증오로 추정됨)의 불길을 품고 그때 사회에 대하여 ○○(반기로 추정됨)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였습니까. 더구나 그는 싸우는 방법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가 진두에 나선 것이 아니고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정의 단합을 먼저 꾀하였던 것입니다.” (《삼천리》 1929년 6월호)

1920년대 중반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주류인 화요회의 간부로 활동했던 홍명희는 이 시기 사상적으로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풍산 홍씨 명문가의 장손인 그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아버지 홍범식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홍명희 자신도 ‘주의자’ 보다는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로 평가되기를 바랐다.

<임꺽정>은 1928년 11월 21일자부터 13년에 걸쳐 연재됐다. 한용운은 “연재기간의 연장으로는 세계적으로 최고 기록일지도 모른다”(조선일보 1937년 12월 8일자)고 했다. 이 기간 동안 홍명희의 투옥과 신병 등으로 모두 네 차례 연재가 중단됐으며 조선일보가 폐간된 이후에는 《조광》에 발표했다.

1920년대 홍명희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남의 책 서문이나 극히 짧은 글들을 청탁에 못 이겨 쓴 것 외에는 거의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글을 쓸 역량을 가지고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오늘날 조선의 각 사회를 너무 비관함이 아닌가 한다”(《개벽》 1924년 2월호)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가 <임꺽정>의 연재를 결심하게 된 것은 안재홍을 비롯해 친분이 깊은 조선일보 사람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임꺽정>의 삽화를 그린 조선일보 학예부장 안석주는 “조선일보에 임꺽정이 실리게 될 때 벽초 선생이 주저하시는 것을 그 당시 신문사 간부 제씨가 강권하다시피 하였고 곁쐐기로 내가 응석같이 졸랐다”(조선일보 1937년 12월 8일자)고 했다. 대개의 소설 원고는 신문사의 급사가 받아 오는 것이 상례였지만 <임꺽정>만큼은 안석주가 직접 홍명희 집에 찾아가 지키고 앉아 있다가 쓰는 즉시 받아 가지고 왔다.

당시는 소설을 읽기 위해 신문을 본다고 할 만큼 신문 연재소설의 인기가 대단했다. 연재소설의 인기에 따라 신문 구독 부수가 달라질 정도였다. 동아일보는 최고 인기작가인 편집국장 이광수가 연이어 소설을 쓰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임꺽정>에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조선일보는 1928년 11월 17일자에 실린 <임꺽정> 연재 예고에서 “세계적 명작 알렉산더(알렉상드르) 뒤마의 <암굴왕>보다도 더욱 그 구도가 크거니와 홍명희 선생의 필치는 오히려 뒤마류의 것보다도 훨씬 장대할 것을 미리 말씀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광고했다.

<임꺽정>은 동아일보를 긴장시켰다. 동아일보는 임꺽정 연재 광고가 나간 직후 이광수의 <단종애사> 연재를 예고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양대 민간지와 문단의 양 거두가 동시에 승부를 겨루게 된 것이다. <단종애사>가 궁중의 권력투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임꺽정>은 핍박받는 민중의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점도 대조가 되었다.

<임꺽정>과 <단종애사>는 모두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고 한다. 어느 쪽이 더 인기를 끌었는지 정확한 통계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임꺽정이 연재되는 동안 조선일보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의 연재소설을 능가할 수 있었다”(《한국언론인물지》)고 회고했다.

첫 연재는 1년여 간 순항했다. 홍명희는 하루 연재분 200자 원고지 13매를 매일 써냈다. 그는 신간회 활동으로 연일 방문객들이 사랑방에 드나들어 소설 창작에만 집중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손님들에게 잠시 기다리라 해놓고 <임꺽정> 원고를 쓰기도 했다. 경황이 없는 중에 쓴 원고도 스토리의 전후가 어긋난다든가 문맥이 안 맞는 대목은 하나도 없어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남녀간의 사랑을 그린 장면은 묘사와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부인과 자식에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임꺽정> 중 “달콤한 러브신”을 읽은 홍명희의 부인은 “요사이 왜 늦게 들어오시나 했더니 정말 늦바람이 나신 모양이구려” 하며 “바람이 나서 다른 여자와 관계를 했게 이런 이야기를 썼지요?”라고 따졌다는 것이다. 작은아들 홍기무도 “어머니, 아버님이 집에서는 대범하기 짝이 없으시지만 밖에서는 실없는 일을 많이 하시는 모양이지요” 했다고 한다. 덕분에 홍명희는 젊은 문인들에게 ‘만풍(늦바람) 선생’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 사건으로 홍명희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자 <임꺽정>은 연재 중단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홍명희는 조선일보의 교섭으로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 안에서 계속 집필할 수 있었다. 김동환은 “이것이 조선에서 옥중작의 첫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12월 24일 홍명희가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송치되자 <임꺽정> 연재는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일보는 연재 중단을 알리는 사고를 실었다.

홍명희가 유치장에서 쓴 1차 연재분의 마지막 대목은 소제목이 ‘왜변(倭變)’이었다. 주인공 임꺽정이 을묘왜변에서 전장에 나타나 왜구를 물리치고 사라진다는 내용이다. 일제에 의해 구속된 상태에서 이 대목을 구상하고 집필한 홍명희는 울분을 삼키며 임꺽정을 통해 항일의 의지를 투사했던 것이다.

중단을 거듭하면서도 13년 간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했던 홍명희는 광복 후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방응모로부터 임꺽정을 완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홍명희에게는 임꺽정 집필보다 독립국가의 건설이 더 중요했다. 그는 “임꺽정이가 독립한 후인 오늘날도 내 뒤를 따라다닌대서야”라면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악처럼 임꺽정도 그만하고 미완성인 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명희는 1948년 월북하여 박헌영, 김책과 함께 부수상에 임명됐다. 1968년 타계해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문제 인물들’의 보호자
방일영 1923~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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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6일 조선일보 발행인과 편집인 명의가 장기영에서 방일영으로 바뀌었다. 방일영의 나이 31세였다. 그는 평소 ‘조선일보는 사설 신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조부인 계초 방응모가 당대의 논객들을 극진히 모시던 모습을 어려서부터 인상 깊게 보아 온 그였다. 그만큼 논설 집필진을 중요시했고, 이 때문에 1950년대 중반부터 조선일보는 뛰어난 논객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부완혁, 고정훈, 고병익, 송지영, 천관우, 최석채, 이열모, 선우휘, 양호민, 송건호 등 기라성 같은 논객들이 속속 논설위원으로 합류했다.

논객들은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질타하면서 4,19 혁명을 이끌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 통령 선거가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졌을 때 조선일보의 사설은 전 국민의 궐기를 촉구하는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였다. 부정선거로 마산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정부가 이를 ‘공산분자들의 선동’으로 몰 때 조선일보는 “학생들의 신성한 애국운동을 공산당으로 모는 수작을 배격한다”는 사설로 받아쳤다. 만약 이승만 정권이 그때 막을 내리지 않았다면 조선일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논객들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붓을 휘둘렀다. 방일영은 훗날 “4.19가 나는 바람에 신문사도 살았다”고 회고했다.

논설위원들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차례로 편집국장이 되어 신문 제작을 책임지기도 했다. 말 그대로 ‘논객들의 시대’였다.

1958년 11월 33세의 천관우가 편집국장에 임명됐다. 1956년 1월 홍종인의 천거로 한국일보에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겨 온 지 2년 만이었다. 젊은 국장을 통해 지면을 쇄신하고자 했던 방일영은 곧바로 2기 수습기자 9명을 선발해 편집국에 새 피를 수혈했다. 1959년 9월 천관우로부터 편집국장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 역시 논설위원 송지영이었다. 정부가 그의 경력을 문제 삼아 “송지영은 안 된다”고 했지만 방일영은 경무대를 찾아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그러고도 ‘된다’ ‘안된다’ 한 달 가까이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송지영에 이어 1961년 1월, 편집국장에 오른 최석채는 정권의 압력으로 대구매일을 그만둔 직후인 1959년 10월 조선일보에 입사한 ‘비밀 논설위원’이었다. ‘요주의 인물’로 정권의 관찰 대상이 된 그의 책상은 논설위원실이 아니라 시사만화가 김규택 옆에 놓였다. 최석채는 국장 재임 3개월여 만에 5.16이 일어나는 바람에 편집국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방일영은 군사정권에 찍힌 최석채와 선우휘를 해고한 것처럼 해놓고는 계속 무기명으로 글을 쓰게 했다. ‘유령 논설위원’이었다.

방일영은 1961년 7월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로 연행돼 2박3일 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정보부는 “당신은 족청계의 부완혁, 혁신계의 고정훈, 이력이 복잡한 송지영, 게다가 4.19 때 대정부 투쟁을 하던 최석채 등의 보스인데 도대체 이 문제 인물들을 데리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라고 방일영을 추궁했다.

이런 일을 겪고도 방일영은 비상임 논설위원 윤주영을 최석채 뒤를 잇는 편집국장으로 발탁했다. 교수 출신으로 입사 1년 10개월 된 윤주영의 나이 33세였다. 방일영의 기대대로 윤주영은 편집국과 신문지면에 젊은 바람을 불어넣었다.

신문의 생리를 꿰뚫었던 경영자
방우영 1928~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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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 조선일보 대표이사가 방일영에서 방우영으로 바뀌었다. 정부가 언론을 교묘하게 규제하기 위해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강행하자 전 사원이 한마음으로 결연히 맞서 이를 저지시킨 지 두 달여 후였다. 동생의 추진력을 높이 산 방일영이 방우영에게 사장 자리를 내주고 회장으로 물러앉으면서 막후에서 조선일보를 보호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방우영은 신문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경영자였다. 1952년 조선일보에 들어온 방우영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납활자로 짠 판을 허무는 작업이었다. 공무국원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던 그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활자를 뽑는 문선 작업도 했고, 밤 10시가 넘으면 촛불과 카바이드 등을 켜놓고 일하는 교열부 근무도 거쳤다.

방우영은 1954년 4월 사회부 기자가 됐다. 그가 문교부에 출입하자마자 ‘한글 파동’이 터졌다. 1954년 3월 대통령 이승만이 “요즘의 맞춤법은 복잡하니 한말의 맞춤법으로 돌아가라”고 특별담화를 발표하자 7월에는 ‘앉았다’를 ‘안잣다’, ‘좋지 않다’를 ‘조치 안타’로 표기하는 한글 간소화 시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오랜 미국 생활로 우리말이 서툰 대통령이 불편하다고 멀쩡한 맞춤법을 바꾸자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정치부 선배들을 따라 국회로 취재를 간 방우영은 “지당 장관, 낙루 장관, 병신 장관들이 모여 앉아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국회의원 조병옥의 질타에 공감해 신문사에 돌아오자마자 이 장면을 자세히 전했다. 그의 말을 들은 정치부장 이규홍은 “그대로 기사를 써보라”고 했고, 쓰고 버리고를 반복하며 한 시간의 산고 끝에 쓴 그의 원고는 번듯한 기사로 실렸다. 그런데 기사를 읽은 편집국장 성인기가 “누가 거들어 줬나?” 한마디 툭 던지는 게 아닌가. 젖 먹던 힘까지 다 해 쓴 기사인데,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방우영은 기자로 뛰어 경륜을 쌓은 뒤 편집국장까지 하고 싶었다. 그러나 1960년 말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 방계회사인 아카데미 극장의 대표를 맡으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1962년 10월 조선일보 상무로 돌아와 신문사 경영에 뛰어들었고 1963년 1월 발행인, 1964년 11월 대표이사에 오르면서 정상을 향한 조선일보의 지휘봉을 잡았다.

방우영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손댄 분야는 편집이었다. 편집이 바뀌면 신문의 얼굴이 바뀐다는 판단에서였다. 편집은 무형의 정보를 신문이라는 유형의 상품으로 바꾸어 놓는 핵심적인 일이라고 믿었던 그는 편집을 바꾸고 개선하는 일이라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방우영이 사장이 된 지 2개월 후인 1965년 1월 편집기자 출신 김경환을 편집국장에 임명하면서 그가 당부한 것은 한 가지였다.

“우리, 신문 한번 멋지게 만들어 봅시다. 김형이 원한다면 뭐든지 지원하겠소. 조선일보라는 제호만 빼고 우리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신문을 만들어봅시다.”

김경환은 방우영의 기대대로 조선일보 지면을 확 뜯어고쳐 놓았다. 그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야근 후 해장국 집에서 요기하고 돌아와 잠도 자지 않고 다시 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속옷과 양말을 시장에서 사다 갈아입으면서 며칠씩 밤을 새웠고, 그런 의욕과 열정 덕에 최고의 편집자라는 말도 들었다. 거듭나려는 조선일보에는 그런 열정이 필요했다.

김경환은 조선일보에 두 번째 입사한 지 2년 7개월 만인 37세에 편집국장에 임명됐다. 근속 연한이 길지도, 지명도가 높지도 않은 그가 국장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당시 조선일보가 편집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알 수 있다. 편집국장 취임 때 그의 일성은 “신문은 뛰어야 한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였다. 이 말대로 김경환은 자신이 먼저 몸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서 달렸다. 뛴 만큼 성과도 있었다. 그가 편집국장을 맡은 1965년에서 1968년 사이 조선일보는 편집을 중심으로 하루하루 눈에 띄게 달라졌고, 판매부수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잘한다는 편집자는 몽땅 데려와 조선일보 한번 말아먹어 보라우.”

방우영은 편집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각 신문사에서 젊고 유능한 편집자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조선일보는 명편집자들의 집합소가 됐다. 사장은 최고의 편집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할 뿐, 누구를 어떻게 데려오든 관여하지 않았다. 김경환이 요청하면 그대로 방을 붙였다. 국제신문 편집자로 이름을 날리다 동아일보에 스카우트 돼 상경한 조영서를 만난 김경환이 “조형, 나 일주일째 야근이야. 좀 도와도”라고 부탁했다. 조영서가 술 취한 김에 “김형이 그렇게 고단하면 내가 가지” 했는데 다음날 조선일보에 방이 붙었다.

사직동 대머리집, 명동 동그랑땡집 같은 편집기자들의 단골 술집이 스카우트 장이기도 했다. 여러 신문이 명멸하던 때, 신문 제작의 핵심을 이루는 편집기자들은 ‘귀하신 몸’으로 이곳에서 즉석 스카우트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신문사의 사세나 대우보다 의리와 정분으로 사람을 따라 회사를 옮겼다.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편집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저녁 때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에 신문 지면이 펼쳐져 자신도 모르게 레이아웃을 하고 있었고, 차비로 100원짜리 동전을 낸다는 게 신문사에서 쓰던 1단짜리 동그란 인물 사진 동판을 내놓아 버스 안내양을 어리둥절케 했다.

1960~ 70년대 연거푸 편집부장을 지낸 조영서의 집은 거의 개방되어 있다시피 했다. 부장 집에 몰려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이리저리 쓰러져 잔 편집기자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해장국 끓여내라고 큰소리를 쳤다. 한 기자가 쉬는 날 낚시 다녀온다고 하자 그 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먹겠다며 5명이 그 집에 몰려가 대기하고 있기도 했다. 차가 밀려 도착시간이 늦어지자 집에 있던 닭 8마리를 미리 잡아먹고, 또 낚시해 온 붕어로 매운탕까지 끓여 먹었다.

호기만발했던 편집부 기자들은 새벽에 방우영 사장 집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야근을 하던 편집부장 조영서는 “사장님, 배가 고파 야근을 못 하겠습니다”라고 사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최병렬 등 야근 기자들을 데리고 사장 집에 쳐들어간 시간은 새벽 2~3시쯤이었다. 사장 부인까지 일어나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있었다. 술도 한잔 걸친 김에 이들은 “사장님, 편집 수당 안 올려주면 농사나 지으러 가렵니다”고 고집을 부렸다. 새벽 4시 반이 되어서야 방우영 사장은 이들에게 양주 한 병을 쥐어주고 겨우 달래서 내보낼 수 있었다. 이들이 그 길로 직행한 곳은 동료 이상우(전 한림대 총장)의 신혼집이었다.

뛰어난 편집자들을 데려왔지만 대우는 마음껏 해 주지 못했던 방우영 사장은 뒤에서 이들을 다독거렸다. 편집국을 둘러보는 방우영에게 “사장님, 양념이 모자랍니다” 한마디 하면 슬그머니 돈을 주어 편집부 기자들이 한잔 할 수 있게 했다. 편집부 기자들은 회장에게도 심부름을 시켰다. 방일영은 일본에서 직접 꽃무늬 컷 50개와 제목 활자를 구입해 오기도 했다. 유려한 제목과 레이아웃이 타지를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의 가파른 상승세가 시작됐다.

독립운동하다 기자 된 과묵한 ‘호랑이’
유봉영 1897~1985
사진1970년 조선일보사 건물 5층에 마련된 성곡도서실 개관식에 참석한 유봉영 조선일보 부사장(오른쪽 끝). 왼쪽에서 두 번째가 도서실 개관을 후원한 성곡 김성곤 쌍용그룹회장, 세 번째가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이다.

6.25가 일어난 1950년 6월 25일자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경계를 요할 괴뢰의 행동>이었다. 마치 전쟁을 예고하는 듯한 내용이다.

“북한 괴뢰집단이 자기네의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 그들의 행동이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금번 조만식 선생과 김삼룡, 이주하 양인을 교환할 문제는 괴뢰측에서 먼저 제의를 하여 놓고, 이제 와서는 이러니 저러니 구실을 붙여가지고 시일을 천연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중략) 주저하는 그 이면에 무슨 내막이 있지 않을까. 금후 그들의 행동을 충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사설의 필자는 논설위원 유봉영이었다. 북한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전날 무슨 예감이라도 받은 듯 이 사설을 썼다고 한다. 유봉영은 오랜 기간 독립운동과 여러 분야의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안목을 체득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해 온 그는 광복 후 복간 과정에서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역할을 해냈다. 교열부장을 하면서 정치면 편집을 하고, 학예부장을 하면서 편집주임을 겸했다. 편집을 하면서 사설을 쓰기도 했다.

좌익 성향의 문동표와 이갑섭이 각각 편집국장과 주필을 맡았을 때 유봉영은 조선일보가 적색 신문이 되지 않게 지키는 방패막이가 됐다. 편집국장이 좌익 기사의 제목을 이렇게 붙여라, 크기는 몇 단으로 하라고 지시해도 편집부장인 그는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된다, 안 된다는 의사표시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이 나오고 보면 좌익의 선동적인 문구나 컷은 빠져 있었다. 편집국장도 그의 소리 없는 저항에는 별수가 없었다.

1948년 12월 하순 편집국장 문동표가 자취를 감췄다. 행방이 묘연했다. 그의 월북 사실이 드러난 것은 한참 후였다. 문동표는 서중회(방응모 장학회) 장학금으로 교토제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중회 출신들이 만든 단체 이심회의 창간회보는 그에 대해 “온순한 가운데 예직(銳直)한 이론과 성벽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적고 있다. 문동표는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에서 서무부, 출판부, 정치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폐간 당시에는 조사부장이었다. 광복 후 1947년 3월에 창간된 대중신보 편집국장을 맡았던 그는 두 달 뒤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좌익 성향의 언론인 단체였던 조선 신문기자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문동표가 갑자기 사라져 공석이 된 편집국장 자리를 유봉영이 이어받았다. 편집국장만 맡은게 아니었다. 재정이 어려운 데다 좌우 대립까지 겹쳐 인력에 공백이 생기다 보니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서너 개 직책을 함께 맡았다. 덕분에 그는 편집국 사정을 속속들이 꿰뚫게 됐다.

신문사에서 유봉영은 ‘돌부처’로 통했다. 말수가 적고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띠고 있었다. 소나기가 와도 뛰어가지 않았다. 남로당 청년들이 공장에 들어와 문선대를 뒤엎고 난동을 부릴 때도 태연자약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난입자들이 오히려 맥이 풀려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 아랫사람이 잘못했을 때도 조용조용 타일렀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상대방이 “네?”하고 물어야 할 정도였다.

이런 돌부처가 벼락같이 소리치며 화를 낸 적이 있었다. 1949년 한 편집기자가 동료 기자와 말다툼을 하다가 홧김에 조판해 놓은 판을 엎어 버렸을 때였다. “이놈!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

전쟁 와중이던 1952년 정월 초하루, 신문을 만들기 위해 출근한 기자는 4명뿐이었다.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오는 판에 정월 초하룻날까지 회사에 나오기가 다들 심란했던 탓이었다. 그래도 유봉영은 묵묵히 신문을 만들어냈다.

국어학자 이숭녕은 유봉영에 대해 “처음 뵈올 때는 원만 중후 과묵의 성격에서 우리가 학자로서 바라는 장점을 고스란히 지니신 분이라고 보았으나, 해를 겪고 보니 ‘맹호출림(猛虎出林)’의 기상이 느껴졌다”며 “오직 이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봉영은 1935년 서른아홉 늦은 나이에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그의 언론계 투신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유봉영은 1919년 3월 7일 평안북도 철산읍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명흥학교 영어교사였던 그는 인근 지역 동지들을 규합했다. 유봉영의 집 사랑채에는 밤마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3.1 독립선언서를 찍는 등사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유봉영에게 전달됐던 독립선언서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독립만세운동 이후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유봉영은 100여 석 소출의 전답과 집을 팔아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로 갔다. 이 돈은 적십자사 창립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던 그는 항일 선전 자금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국내, 일본 등을 오갔다. 상해 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동 중에 그는 일제에 체포돼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

유봉영은 1920년대부터 시인 김억 등으로부터 신문사에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활동해야 할 처지에 어떻게 직장을 가질 수 있나 하는 생각에서 거절했다. 그러나 3.1 운동 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면서 독립군의 활동도 어려워졌다.

그는 “장기적인 방법을 취해서 민족의 정신적 물질적 역량을 배양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조선일보 교정부장 김찬룡이 1년 넘게 유봉영에게 입사를 재촉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이 어렵게 된 마당에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신문사였다. 30년이 넘는 그의 조선일보 인생을 이렇게 시작됐다.

유봉영은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있던 1964년 ‘언론윤리위법 철폐 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이 법의 제정을 막아내는 데 앞장섰다. 언론계가 한데 뭉쳐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지만 위원장 자리는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발행인협회, 편집인협회 대표들이 연일 회합을 가진 끝에 외유내강의 유봉영을 최고 적임자로 추대했다. 충남 유성에서 열린 박정희와 언론계 대표들의 담판 자리에서 모두들 표정이 굳어 있었으나 유봉영만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고 한다. 이 회담으로 언론윤리위원회법은 보류됐다. 이와 관련해 유봉영은 “신문의 자주란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밖에 없음을 새삼 느꼈다”고 회고했다.

유봉영은 19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 되면서 조선일보를 떠났다. 그는 정계로 나간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손자 유동선은 말했다. “조선일보에서도 처음에는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언론인으로 끝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박 대통령이 자꾸 추천하고 압력을 넣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유봉영은 우리나라 역사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1950년대 말부터는 역사학자 김도태의 부탁으로 그가 교장으로 있는 서울여상에서 10여 년 간 역사 수업을 하기도 했다. 1966년 유봉영은 ‘압록강 두만강 너머 만주 땅도 우리 영토’라는 기치를 내건 백산학회 창립에 부회장 겸 총무로 참여하여 회장까지 지냈다. 언젠가 중국과 국경 문제가 불거질 때를 대비해 학문적으로 대비해 둬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유봉영의 안방, 사랑방, 마루, 다락 벽면은 모두 책이었다. 수천 권의 책을 정리하기 위해 직접 책장을 디자인해 맞추기도 했다. 6.25 피난 때는 마루를 뜯고 독을 묻으면서 그 속에 책을 밀봉해 두었다. 그의 아내는 늘 “저 책 다 누가 물려받을까” 하고 걱정했다. 유봉영이 세상을 뜬 후 역사 서적은 모두 백산학회에 기증됐다.

정부는 유봉영의 독립운동을 평가해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손자 유광선은 조선일보 총무부장을 거쳐 유관기관인 방일영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해박한 지식의 영원한 현역 기자 ‘홍박’
홍종인 1903~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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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3일 사회민주당 결당식이 열렸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이끈 좌익 색채의 군소정당이었다. 조선일보 편집국에서는 이 기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아예 보도하지 말자는 주장도 드셌다. 이때 정경부장 겸 부국장 홍종인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제 의사가 표시되지 않으면 다음에 할 일은 폭력밖에 없다. 정치에도 타협과 조화가 있을 것 아니냐. 저들에게 숨 쉴 곳은 터 주어야 한다.”

이 기사는 이튿날 조선일보 1면에 실렸다.

언론이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때였다. 우익에 가까운 주장을 하면 좌익에서 공격하고, 좌익적인 경향을 보이면 우익에서 비난했다.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면 회색분자로 몰아세웠다. 홍종인은 공산당은 용납할 수 없다며 민족적 입장을 지켰다. 그러나 지면에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홍종인은 이건혁 후임으로 1946년 9월 편집국장이 됐다. 좌익 노조의 총파업으로 서울에서 단 한 장의 신문도 발행되지 않았던 ‘암흑의 날’(9월 26일)이 있고 난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념 갈등의 시대에 그가 편집국장으로서 가장 고민한 것은 “보도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였다. 홍종인은 언제나 언론 본연의 원칙과 정도를 잃지 않으려 애썼고 이것이 그를 ‘평생 기자’로 만들었다.

홍종인은 1948년부터 1959년까지 주필을 맡았다. 중간에 김석길이 1년 간(1949년 11월~1950년 10월) 주필을 맡아 홍종인의 주필 재임 기간은 10년이다.

홍종인은 주필 시절 한글로만 사설을 썼다. 일제 강점기에 ‘내 글의 횃불을 추켜들고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기자로서 보람을 느꼈던 그였다. 광복을 맞아서는 ‘마음 놓고 우리말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감격이었다. 홍종인은 서재필 박사가 독립신문을 만들 때의 그 정신을 계승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문인기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우리글을 더욱 갈고 닦았다. 1930년대 후반에 쓴 그의 편지글 ‘부용화’가 제1차 교육과정(1954~63년)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글 솜씨도 인정받았다.

그는 주필이면서도 취재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953년 휴전 협상이 진행될 때 중요한 회견의 뒷좌석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외무부 기자실까지 드나들었다.

홍종인은 매일 아침 사설 제목 네댓 개를 준비해 출근했다. 글을 쓰기 전에는 후배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가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검증해 보았다. 집필도 신중했다. 신문 조판이 끝나가는 데도 그의 고민이 끝나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편집국장 성인기는 “신문이 홍 주필 거야?”라고 외쳤다. 두 사람은 자주 부딪쳤다. 홍종인이 성인기의 깐깐한 성격을 빗대 “저 맹꽁이, 답답해서…”라고 혀를 차면, 성인기는 “대학도 안 나온 게 입만 살아서”라고 맞받았다. 그러면 같은 연배의 신문만화가 김규택이 “육갑들 떨고 있네”라고 싸잡아 면박을 주었다. 그만큼 흉허물 없는 사이들이었다. 홍종인과 성인기는 사사건건 자존심 싸움을 벌였는데 후배들 눈에는 애증이 엇갈리는 부부처럼 보였다.

어느 날 홍종인이 후배 논설위원에게 “이게 사설이야?”라고 호통을 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사설은 분명한 주장과 직설적인 비판을 담아야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훈훈하고 품격을 지켜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홍종인은 ‘홍박’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어느 분야든 막힘이 없었다. 엄청난 독서 덕분이었다. 이 ‘칭호’의 연원은 1930년대로 올라간다. 그가 사회부 차장으로 있을 때 수해가 잦아 일기예보 기사가 중요해졌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홍종인이 집중 연구를 해서 일기예보 기사를 완전히 새롭게 선보였다. 이때부터 그는 ‘천기 박사’로 불렸고 이것이 ‘홍 박사’, ‘홍박’으로 변천했다. 외국에 나가면 ‘닥터 홍’이 됐다. 그의 취미도 등산, 테니스, 미술, 사진, 음악 등 박람이었다. 1946년 한국산악회 발족에 참여해 부회장,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사회부에 있을 때부터 홍종인은 음악과 스포츠에 관한 기사도 많이 썼다. 음악평론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훤칠한 키에 우뚝한 코가 미국 배우 게리 쿠퍼를 닮아 여성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서른다섯 살에 피아니스트와 결혼한 그는 애처가로 유명했다.

홍종인은 “나는 중학교(오산중)까지밖에 못 다녔다. 신문사에 들어와서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해 왔을 뿐…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고 했다. 학력은 늘 그에게 아킬레스건과 같았지만 그것때문에 더욱 분발했다.

홍종인은 6.25 피난길에서도 늘 책을 끼고 다녔다. 주필 시절 그의 방은 편집국 옆에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온갖 책들이 즐비했고, 복도 쪽 출입문은 언제나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앞을 지나는 기자들은 곧잘 그 문으로 불려 들어가곤 했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지?”

이 질문이 무서워 기자들은 손에 책을 쥐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1954년 광복 후 첫 수습기자가 들어왔을 때 홍종인은 주필실에 그들을 모아놓고 따로 공부를 시켰다. 회사가 수습기자들의 영어 학원비를 지원해 주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월급 주기도 어려운 때였다.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 등을 지낸 조덕송이 조선일보로 옮기기 전 길에서 우연히 홍종인과 마주쳤다. 홍종인은 “조 군, 요즘도 술을 그렇게 많이 하나?”라고 물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문기자가 필요에 따라 술자리를 하고 기염을 토해 보는 것도 좋지. 하지만 그것을 일과로 삼으면 공부를 못 하게 돼. 세상은 날로 변해 가는데 신문기자는 변하는 세상을 앞질러 가야 하는 게야. 그래야 사회를 이끌어 가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테니까.”

홍종인은 기자의 품위와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편집국에 나타났다 하면 넥타이를 매지 않은 기자들은 공무국, 화장실, 복도 등으로 피신했다. 걸리면 “이래도 조선일보 기자야?”라는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머리가 텁수룩한 기자를 보면 “야, 거기 서! 머리가 그게 뭐냐. 돈 없냐?”며 돈을 주기도 했다. 점퍼 차림으로 출입처에 나갔다가 홍종인을 만나는 바람에 즉시 택시로 집에 가 정장차림으로 바꿔 입고 돌아온 기자도 있었다. 홍종인은 그 기자가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렸다.

1960년대 기자실에서는 종종 포커판이 벌어졌다. 기자들에게 홍종인은 ‘겜뻬이(헌병)‘로 불렸다. 불쑥불쑥 기자실에 들르는 그를 막을 길이 없었다. 어느 날 현장을 덮친 홍종인이 “손들어!”라고 외쳤다. 양손을 번쩍 든 사람, 손을 든 채 카드를 구겨서 뒤로 던지는 사람, 판돈을 움켜쥔 사람 등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소속사와 이름을 대. 발행인들한테 알려 목을 자르라고 해야지.”

물론 소속사에 실제로 통보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63년 홍종인은 회장을 끝으로 조선일보를 떠났다. 그 후에도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신문사에 들렀다. 여름엔 테니스 라켓을 든 채, 겨울엔 등산복 차림으로 찾는 때가 많았다. 편집국에 들어서면서 대뜸 “오늘 아침 그 기사 누가 썼어?”라고 물었다. “기사를 이렇게 쓰면 되나, 무식한 기자가 썼으니 무식한 기사가 될 수밖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걸 신문이라고 만들었나, 도대체 신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심스러워” “이 제목은 누가 달았어. 이 따위 편집이 어딨어?” 그의 꾸지람은 끝이 없었다.

홍종인은 연말이면 후배들에게 문화재나 자연 풍경 등을 직접 그린 연하장을 보냈다. 그의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주필 시절 그는 주필실에 캔버스를 갖다 놓고 그림을 그렸다. 해외출장 때 스케치북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이 신문사 저 신문사를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아무 신문사에나 불쑥 나타나 편집국을 휙 한번 돌아보고는 이것저것 나무랐다. 홍종인이 근무한 적이 없던 신문사 사람들도 “혹시 그분을 우리 신문의 편집국장이나 주필로 모신 일이 있지 않았나 하는 착각에 빠진다”고 할 정도였다. 1951년 10월 제1차 한일회담 취재차 일본 도쿄를 방문했던 홍종인은 다른 신문사 특파원들에게 “손색없는 한국 특파원으로서 활동하는 데 보탬이 되길 바란다”며 격려금을 건네기도 했다. 비행기 대신 기차와 배를 타면서 아낀 돈이었다.

1974년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 때 홍종인은 개인 이름으로 광고비 10만원을 내고 자신의 주장을 담은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 라는 의견광고를 실었다. 언론계 어른으로서 유신정권의 서슬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후배들에게 보인 것이었다. 그때부터 동아일보에 개인 이름의 광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유신정권이 프레스카드제를 실시하려 하자 그는 언론탄압책이라며 명함 크기의 반대 전단을 만들어 일일이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홍종인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시대일보 평양지국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조선일보 평양지국 기자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재홍 주필에게 필력을 인정받아 사회부 기자로 발탁돼 이름을 날렸다. 1935년 사회부 차장으로 승진했고,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때는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을 전하는 호외 발행을 진두지휘했다.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제작 과정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을 주관해 예술적 소양을 발휘하기도 했다. 중일전쟁의 전선에 특파되어 전쟁 현황을 보도하기도 했는데 함께 갔던 매일신보 기자 유광렬은 이렇게 회고했다.

“홍종인은 아주 활동적이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수완도 보통이 아니었다. 트럭을 타고 일선으로 향할 때도 그가 나서서 교섭하면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좁은 틈이나마 한 자리 얻어 타려고 눈치만 보곤 하는데 그는 일본 군인들에게 호통도 잘 쳤다. 이 때문에 나도 덕을 많이 보았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 홍종인은 매일신보에 들어갔다. 그에겐 그게 씁쓸한 흔적이었다. “내 기자 생활 중 매신(매일신보)만 빼면… 그땐 세 신문사(조선, 동아, 매일신보)를 합치니 뭐니 말이 있어서 옮겼지만… 다 망해가는 놈의 나라, 망국의 마지막 꼴을 신문사에서 지켜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

1984년 서울언론인클럽이 언론상을 제정하면서 그 이름을 ‘홍박 언론상’으로 하려 했다. 그러나 홍종인은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현역 기자야.” 평생 현역 기자 홍박은 1998년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장수 편집국장 지낸 깐깐한 ‘앵 선생’
성인기 1907~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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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어 내 나라가 서면 정치를 한다더니 왜 안하느냐?”

“.......”

성인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치를 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조선일보 재건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광복이 되자마자 성인기는 조선일보에 돌아왔다. 덩그러니 이름만 남아 있는 ‘친정’이었다. 폐간 전 함께 일하던 선배들은 정치로, 언론으로 새 뜻을 펼치기에 바빴다. 기틀을 다지기까지 당장 편집 책임을 맡을 만한 사람은 성인기뿐이었다. 1945년 10월 1일 그는 편집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편집위원회라고 이름은 달았으나 처음 함께 시작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9명이었다. 밤샘 작업이 연일 계속됐다. 성인기는 후배 주낙찬이 몸이 아파 힘들어하는 줄 알았지만 병원에 가 보라고 말해 줄 수도 없었다.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인원을 충원해 복간호가 나올 즈음에는 네댓 명이 늘어나 있었지만 역시 태부족이었다.

어려운 속에서 복간호가 나온 후 점차 독자와 광고도 늘었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편집진용도 강화됐다. 다시 선배들을 모시게 된 성인기는 편집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복간호 발행 석 달 만인 1946년 2월 성인기는 “사상이 붉다”는 모함을 받아 회사를 떠나게 된다. 이어 후배 주낙찬이 방광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복간 작업에 참여하느라 치료시기를 놓친 것이다. 성인기는 “주낙찬 군은 나 때문에 죽었어. 수술이 늦어져 결국 죽고 말았다”며 애통해했다. 괴로운 시기였다.

조선일보 퇴사 후 성인기는 대성출판사 고문으로 일했다. 와세다대 정치학과 출신이었던 그는 이때 전공을 살려 정치사상 서적을 번역 출간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루소의 《민약론》, 쑨원의 《삼민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등 대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내용들이었다.

1950년 초 사장 방응모로부터 연락이 왔다. 성인기를 모함했던 사람이 월북했다고 했다.

‘나보고 그러더니 자기가 빨갱이였구나!’

오해는 풀렸다. 방응모의 거듭된 부름에 성인기는 다시 조선일보로 돌아와 편집국장을 맡았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복직 5개월 만에 6.25 전쟁이 터졌다. 사흘 만에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고, 성인기와 조선일보 직원 80여 명은 정치보위부로 연행됐다.

“나 혼자 남겠으니 저들은 다 놔 주시오.”

의외로 인민군은 성인기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줬다. 그는 하루 동안 혼자 억류돼 있었다. 이튿날 북쪽에서 중요인사가 도착한 듯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듯싶더니 연락하면 다시 오라며 성인기도 풀어 주었다. 낌새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그는 일단 신문사에 나가지 않고 임시 거처에 몸을 숨겼다.

7월 16일 미군의 공습으로 용산 일대가 잿더미가 됐다. 더 이상 서울에 머무를 수 없었다. 성인기는 고향인 충남 아산까지 걸어갔다. 그곳에서 낮에는 들이나 산으로 나가 몸을 숨겼고, 밤에는 부엌 바닥에 묻어 놓은 항아리 속에 숨어 지냈다.

성인기가 다시 신문 제작에 복귀한 것은 9.28 서울 수복 후였다. 조선일보는 이후 전세에 따라 피난과 귀환을 반복하면서 신문 발행을 계속했다. 1.4 후퇴로 서울을 떠날 때 성인기의 아내는 결혼 10년 만에 첫 아이를 가져 임신 7개월이었다. 두 사람은 돈암동 집에서 신문사가 있는 광화문까지 함께 걸어가 성인기는 전시판을 만들기 위해 부산으로, 아내는 친척들이 있는 아산으로 향했다.

부산진 역, 쏟아지는 피난민들 사이로 구겨진 조선일보 사기가 나부꼈다. 성인기가 군에 징발되는 조선일보 지프에서 떼어내 가져온 것이었다. 깃발 아래 모인 조선일보 사원 40여 명은 영도다리 부근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신문을 만들었다. 성인기의 아내 김수한은 그가 평생 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이 사기를 1980년 조선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일에 조선일보에 기증했다. 성인기는 전쟁 속에서도 독자들의 성원이 신문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피난 시절 경제적으로 빈곤했으나 우리 사설을 들고 와 격려해 주는 정신적 지원자가 많음을 보고 용기를 잃지 않았다. 수원도립병원 앞의 민가에서 신문을 발행할 때는 순식간에 만여 독자가 몰려드는 걸 보고 새삼 신문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조선일보 1965년 3월 5일)

전쟁이 끝나고 1954년경 성인기가 빨갱이라는 벽보가 시중에 나붙었다. 그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사설을 쓰는데 대한 위협이었다. 성인기는 편집국장을 맡고 있으면서 정치 관련 사설을 썼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며칠씩 숨어 다녀야 했다. 그러면서도 사설을 계속 썼다. 사장 장기영은 “일본행 비행기 표를 준비해 두었으니 마음 놓고 정권을 비판하라”고 격려했다. 장기영은 성인기가 사설을 쓸 때면 옆에 앉아 기다리면서 그의 글을 보고는 “이 맛에 성 국장에게 쓰라는 것”이라며 캐비닛에서 양주를 꺼내 따라주곤 했다. 장기영은 후에 한국일보를 창간할 때 성인기를 편집국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성인기는 1958년 11월 천관우에게 편집국장을 물려주기까지 8년 9개월 동안 편집국장을 맡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조선일보 최장 편집국장 재임기록으로 남아 있다. 후배 기자들은 그를 “조선일보에 혼을 불어넣은 사람”으로 평가했다.

성인기의 별명은 ‘앵 선생’이었다. 깐깐한 성품과 끊임없는 잔소리에다 금속성 목소리를 빗댄 별명이었다. 당시 기자들 중 ‘앵 선생’의 설교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실컷 꾸중을 해놓고도 끝에는 꼭 “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요. 생각해 보지 그래”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건방지다”거나 “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치명적이었다.

성인기는 여기저기서 원고청탁이 들어와도 대부분 거절했다. 신문사 월급을 받으면서 외부 원고를 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꼭 써야할 외고는 퇴근 후 집에서 썼다.

그는 선물이 들어와도 받지 않았다. “문이 있어 바람 막고 지붕 있어 비 안 새면 족하게 여기며 사는 게 도리”라고 가족들을 타일렀다. 선물을 들고 성인기의 집을 찾아갔다가 불호령만 듣고 쫓겨난 사람도 여럿이었다. 후배가 참외 한 상자를 들고 왔을 때 그는 “국장인 나도 어렵게 사는데 네가 무슨 돈이 있느냐”며 돌려보내기도 했다. 양복도 10년이 넘어 소매가 해진 것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작고 단단한 체구에서는 강한 힘이 넘쳐나는 듯했다. 안경 속의 눈도 날카롭게 빛났다.

1959년 성인기가 부사장으로 있을 때였다. 회사 근처 식당에서 사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장 방일영의 동생인 기자 방우영이 성인기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해서 큰맘 먹고 입을 열었다. “저도 기자 생활 10년 가까이 했으니 차장 한번 시켜 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성인기는 “(사주 집안인) 방씨가 무슨 차장이야!” 라고 딱 잘라버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방우영은 “무교동 밤거리가 유난히 냉랭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 수습기자 1기 출신인 장병칠은 성인기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규제하고 거기에 얽매여 스스로 고독해지는 스타일이었다”면서 “남에게 생색낼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적잖이 오해도 받았던 것 같다”고 했다.

성인기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33년 12월이었다. 은사였던 백농 최규동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최규동은 민족운동가이자 교육자로 광복 후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성인기에게 최규동은 “너에겐 글 쓰는 재주가 있으니 붓으로 많은 사람들을 계도하라”며 조선일보 입사를 권했다. 성인기는 4년 동안 사회부 기자로 활약했다. 이때 김기림, 채만식의 뒤를 이어 질박한 어촌의 삶을 사진과 함께 미려한 문장으로 엮어낸 <생활해전(海戰) 종군기> 시리즈를 6회 연재하기도 했다. 그는 편집부를 거쳐 1938년 논설위원이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성인기는 시신을 붙들고 “때가 되면 그토록 원하시던 대로 정치에 나서겠습니다”라며 울었다. 그 약속대로 그는 1960년 고향인 충남 아산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1963년 공화당에 들어가 당무위원 등을 지냈다.

광복군 출신의 덕장 ‘조선일보의 유비’
유건호 1922~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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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20일 정오 무렵 중앙청 기자실이 술렁거렸다. 여수에서 국군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순천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유건호는 다른 기자들과 함께 내무부 장관실로 뛰어올라갔다. 모두 쉬쉬 하는 눈치였다. 취재가 되지 않았다.

유건호는 급히 신문사에 연락했다. 즉시 편집국에서는 회의를 열어 현장에 기자를 파견하기로 했다. 사회부장 김찬승은 친구에게 빌린 1만원과 교통부에서 받은 철도 무임승차권을 유건호에게 쥐어 주며 얼른 떠나라고 했다. 현지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유건호는 기차에 올랐다.

21일 새벽, 열차가 전주역에 멈춰섰다. 더 이상 못 간다고 했다. 순천 인근 일대가 인민위원회 치하에 들어가 자동차로는 물론 걸어서도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틀 뒤인 23일에야 가까스로 군용 트럭을 얻어 타고 남원에 있는 국군 연대본부에 닿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부연대장이 호의를 보였다. “다른 신문은 ‘국군이 반란’이라고 했는데, 조선일보는 ‘국군 일부’라고 하셨더군요. ‘일부’를 강조한 점이 마음에 듭니다.” 그날 저녁 유건호는 부연대장의 주선으로 탄약 수송 트럭을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자리는 짐칸 탄약상자 위였다.

동이 터 올 무렵, 트럭이 순천 북쪽 어귀에 위치한 순천 북국민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운동장과 뒷산 중턱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총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어디서 온 기자요?”

전남 경찰국 부국장 최천이 다가와 물었다.

“카메라 가져왔습니까?”

“아니오.”

“좀 있다가 총살형을 집행할 텐데.”

최천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유건호는 현장 상황을 메모하기 위해 연필과 원고지를 꺼내들었다. 밤새도록 탄약상자 위에서 추위에 시달린 탓인지 손발이 떨려 도저히 적을 수가 없었다. 최천이 자신의 수통을 건넸다. 배갈이 들어 있었다. 서너 모금 들이켜니 더운 기운이 몸에 퍼졌다.

유건호가 보낸 기사는 1948년 10월 27일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사회면은 온통 여순 반란 사건 기사로 채워졌고, 그 중 4개가 ‘유건호 특파원 발’ 기사다.

“사람 소리가 많이 나는 곳을 쳐다보니 순천 읍민이 거의 전부 초등학교 마당에 집결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모두 벌벌 떨고 있고 젊은 사나이들은 수색을 당하느라고 빤스만 입고 있다. 질서가 완전히 회복된 줄만 알고 들어갔던 기자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모여 있는 군중 속에서 반란에 참가하였던 그 지방민을 손으로 지적하여 뽑아내고 있다. 손가락이 한 번 가르쳐진 사람은 사정없이 끌려 나간다. 끌려 나간 사람들은 또다시 그 집단 속에서 자기와 같이 행동하던 사람들을 끄집어내도록 명령을 받는다. 주저하다가는 얻어맞고 주저하다가는 얻어맞고 한 끝에 결국 또 하나를 손가락질한다.”

날이 밝은 후 유건호는 순천 읍내로 나갔다.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손들엇!”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 그림자만 보여도 우선 한 방 쏘아 놓고 수색하는 모양이었다. 삼엄하기 이를 데 없는 거리는 황량했다. 토벌군 부대에 이르자 군인들이 대략의 사건 진행 상황을 알려주면서 “길을 걸을 때는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가라”고 주의를 줬다.

그곳을 빠져 나와 경찰서에 가 보니 온통 피바다였다. 반란군에 의해 내복만 입은 채 끌려나온 사람들이 굵은 철사로 줄줄이 묶인 채 총살당한 것 같았다. 몇 시간 전 초등학교에서 만났던 경찰관들의 살기등등했던 모습이 이해가 됐다.

유건호는 순천 곳곳을 돌아다니며 처참한 광경들을 모두 기록했다. 문자 그대로 시산혈하(屍山血河: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룸)였다. “한 조상의 피를 받은 동족끼리 왜 이같이 학살을 감행하는 것인가!” 그는 울분과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취재를 마치고 상경하려던 오후 3시쯤이 되어서야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내려왔다.

여순 반란 사건은 유건호의 취재력과 필력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가 순천에서 목격한 광경은 조선일보 10월 27일자부터 31일자까지 연이어 실렸다. 26세, 경력 2년의 사회부 초년 기자는 울분과 흥분을 자제하며 담담하고 정확하게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다. 그의 성격대로 였다.

유건호는 1946년 3월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조선일보가 복간 후 젊고 패기 있는 사람들을 채용해 편집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을 때였다. 유건호는 일제 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됐다가 조선인 사병 2명을 데리고 탈출, 만주의 광복군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방응모의 고향 사람 김정찬을 만났고, 광복 후 그의 소개로 조선일보에 들어왔다.

1946년 말 유건호는 좌익세력의 총집결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에 취재차 들렀다. 그날따라 사무국장이 반갑게 맞아 주면서 “세모가 됐으니 무어 예물이라도 드려야 도리인데, 아시다시피 민전의 살림이 넉넉지 못하니 이것이라도 증정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소이다”라면서 그들이 발간한 책 《해방 1년사》를 줬다.

신문사에 돌아와 책장을 넘겨보던 유건호는 깜짝 놀랐다. 빳빳한 10원짜리 지폐가 책 속에 끼워져 있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갈피갈피 100장이었다. 모두 1000원, 당시 그의 월급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편집국장 이건혁에게 가져가 얘기하자, 그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자들에게 술대접하는 것은 몰라도 대놓고 돈을 주는 경우는 흔치 않을 때였다. “술들이나 마셔.” 그날 밤 편집국 직원들은 진탕 술을 마셨다.

여순 반란 사건을 취재한 이듬해인 1949년 유건호는 27세의 나이에 사회부장이 됐다. 편집국에서는 “부장이 너무 젊다”고 불평이 많았으나 사장 방응모는 “젊은이를 키워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군 장교로 부하들을 거느려 보았던 유건호는 능숙하고 치밀하게 취재 지시를 내렸고, 부원들의 신망을 얻었다. 1959년 5월 5일 새벽,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지방 선거 유세를 가던 중 기차 안에서 급서했을 때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건호는 급히 신문사에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출근한 기자는 문교부 출입기자 문계준뿐이었다. 유건호는 문계준에게 “회사 지프를 타고 대전 쪽으로 가다가 신익희 선생 유해를 실은 기차를 만나면 그 기차에 옮겨 탄 후 사망 경위를 취재하게. 취재가 끝나면 지프에 옮겨 타고 최고 속도로 달려와 기사를 쓰라”고 지시했다. 문계준은 그 지시대로 신익희의 유해를 싣고 가던 기차에 올랐고, 그곳에서 부통령 후보 장면과 단독 인터뷰했다. 그 덕에 조선일보는 민주당의 공식발표가 나오기도 전에 신익희 사망 관련 호외를 단독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와 같은 명령과 또 명령에 따라 한 치 착오도 없이 움직이는 것이 사회부의 규칙이었다”고 문계준은 당시 사회부 분위기를 증언했다.

유건호는 온후하고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유건호가 화내는 것 봤어?” 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연배와 입사 시기가 비슷한 김창헌, 방낙영 같은 기자들도 그의 말이라면 잘 따라 주었다. 나이 어린 후배들은 그를 형님같이 믿고 의지했다. 일선 기자가 쓴 원고를 부장이 “이것도 기사냐”며 찢어버리는 일은 편집국에서 흔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유건호는 달랐다. 영 쓸 수 없는 기사는 조용히 쓰레기통에 버렸고, 기자들이 흥분해서 한 편으로 치우친 기사를 써 내면 부드러운 말로 바로잡아 주었다. 후배들에게는 부스스한 머리와 바지 밖으로 삐죽이 나온 와이셔츠까지도 그의 보스다움을 더해 주는 일종의 장치처럼 보일 정도였다.

1962년 유건호가 편집국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부하들을 품에 안는 덕장으로서 편집국을 이끌어갔다. 후배들은 “유건호 국장은 ‘조선일보의 유비’라는 호칭을 받을 만하다”고 했다. 1960년대 중반 30대에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방우영이 젊은 혈기를 내세울 때면 유건호는 말없이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필묵을 꺼내 ‘인(忍)’자를 크게 썼다. 그걸 본 방우영은 뜻을 알아차리고 아무 말 없이 나가곤 했다.

유건호는 두주불사였다. 자유당 시절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김두한이 이승만을 비방하다 구속당하자 조선일보는 이를 기사화했다. 다음날 김두한 부하들이 찾아와 저녁을 사겠다고 했고, 사회부장 유건호와 기사를 쓴 방우영이 따라나섰다. 초대받은 요정에는 ‘마모’라는 이름난 종로 주먹계의 두목을 비롯해 험상궂은 사람들이 즐비했다. 그들이 잔을 권하는데 손이 얼마나 큰지 술잔은 보이지 않고 거친 주먹만 오락가락하는 듯 했다. 정종 열 되 가량이 들어왔고, 그 태반을 유건호가 태연하게 받아 마셨다. 그러면서도 몸가짐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방우영은 “신문기자가 되려면 저렇게 술도 세고 두둑한 오기와 배짱도 있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유건호는 평소에도 소주를 맥주잔에 가득 부어 단숨에 쭉 들이켰다. “술을 홀짝홀짝 감질나게 마실 게 뭐냐”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부드러움 못지않은 카리스마도 있었다. 결정적 시기에는 강해야 한다는 게 유건호의 소신이었다. 3.15 부정선거 후 마산에서 데모가 일어났을 때 출장 간 기자들이 송고하는 내용을 그대로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그였다. 손이 모자랄 때면 전화로 보내오는 기사를 직접 받아 적으며 간간이 “더 보탤 것 없어? 덤비지 말고 찬찬히 보내”라며 기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5.16 후 기사에 불만을 품은 해군이 취재기자를 연행하고 신문사에 사죄를 요청해 왔을 때는 ”일방적인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사건은 원만하게 해결됐고, 끌려갔던 기자도 혹독한 고초를 피할 수 있었다.

유건호는 기침이 심했다. 멀리서 ‘큭 크윽’ 하는 소리만 들려도 그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부산 분실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직업병’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 서울 본사로 전화 송고를 하는데, 전화 사정이 좋지 못해 음질이 나빴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통화하기를 1년 반, 그때부터 시작된 기침은 평생 그치지 않았다. 그의 기침 소리가 극에 달한 때는 1975년 조선일보 기자들이 제작 거부를 일으켰던 ‘3.6 사태’ 때였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유건호는 10년 만에 다시 편집국장 자리를 맡았다. 더욱 잦아진 기침을 하면서 그는 기자들을 설득했다. “기자의 사명은 취재 보도함에 있는데 어찌 그 사명을 망각하고 제작을 거부하고 방해한다는 말인가.”

유건호는 상무, 전무, 부사장, 발행인을 두루 거친 뒤 1987년 퇴임했다. 그의 평생 이력은 ‘조선일보’ 단 한 줄뿐이었다.

IPI가 선정한 ‘20세기 언론자유 영웅’
최석채 1917~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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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이 일어난 지 이틀 후인 1961년 5월 18일 밤, 조선일보 편집국장 최석채는 자정이 가깝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돼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언론인들이 연이어 연행되면서 언론계 전체가 뒤숭숭했다.

국장석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최석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한참동안 “안 된다” “그럴 수 없다”는 실랑이를 벌이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수부대 군인 2명이 편집국에 나타났다. 가슴에 수류탄, 옆구리에 권총으로 무장한 소령과 중위 계급의 혁명군이었다. 두 사람은 국장 책상 양쪽에 버티고 서더니 “전화로는 이야기가 안 돼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왜 못 하겠다는 거요?”라고 위협했다.

“아까 전화로 누누이 얘기했지 않습니까? 이 중대한 시국에 관한 방송 문제를 어떻게 구멍가게에서 물건 사듯 할 수 있겠소. 그러니 좀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지 않았소?”

“무엇을 생각해 보겠다는 겁니까? 군사혁명을 지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분명이 말하세요.”

“좋소, 분명히 말해 드리지요. 혁명에 공명은 합니다. 그러나 아직 지지는 할 수 없기 때문이요.”

“공명은 하지만 지지는 못 한다 말이지요. 알겠수다. 그렇게 보고 드리지요.”

이 순간 옆에 있던 중위가 권총을 뽑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소령은 “야야, 그러면 안 돼. 오늘은 그만 가자”면서 독기 어린 얼굴로 돌아섰다.

그들을 물리친 후 최석채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더니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천장을 응시했다. 이런 식으로 군사정권에 밉보인 최석채는 얼마 후 편집국장에서 물러나 한동안 무기명으로만 글을 쓰며 ‘유령 논설위원’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가 당국과 불화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언제나 꼿꼿하게 바른 말을 하는 그는 권력을 가진 자에게 눈엣가시였다. 최석채는 대구매일신문 주필이던 1955년 9월 자유당 정권이 학생들을 정치행사에 동원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한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를 썼다. 그 사설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자 대낮에 테러를 당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30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정권의 계속되는 압력으로 1959년 9월 결국 대구매일신문을 그만두어야 했다.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힌 최석채를 받아 준 곳이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 회장 홍종인은 그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어차피 잘됐네. 방일영 대표한테 내가 이미 승낙을 받아 놓았으니 딴 생각 말고 내일부터 여기로 나와 글을 쓰게.”

처음 서울에 올라와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몸담았을 때 그의 별명은 ‘이나카 사무라이(시골 무사)’였다. 작은 키에 유행에 동떨어진 옷차림으로 촌티가 나는 데다 타협을 모르는 고집쟁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의 진한 경상도 사투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논설위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때부터 최석채는 ‘발로 쓰는 논객’이었다. 마감시간을 코앞에 두고도 택시를 타고 다니며 직접 취재한 후에야 글을 썼고, 틈틈이 충무로 헌책방을 찾아 자료를 모았다. 특히 광복 후 정치사에 대해서는 식견이 뛰어났다. 역사학자로 이름을 떨친 고병익도 정치적 사건의 배경에 대해선 그에게 물어보고 판단을 내릴 정도였다.

조선일보에 몸담은 지 5개월여 만인 1960년 3월 최석채는 사설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로 4.19 혁명의 불길을 지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가 마산을 중심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주동자에 대해 “배후를 가려 의법 처단할 것”이라며 강경 자세로 나왔다. 조선일보 안에서도 이를 어떻게 지면에 반영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3월 16일 열린 임원 회의에서 회장 홍종인과 부사장 성인기, 주필 유봉영은 “사태의 진전을 봐 가며 판단하는 게 좋겠다”는 신중론을 폈다. 그러나 편집국장 송지영과 논설위원 부완혁, 최석채, 고정훈 등은 “그럴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날 밤 논설회의 끝에 최석채가 대표 집필을 맡기로 했다. <호헌 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3월 17일자 석간 1면에 게재됐다.

“뜻 있는 전 국민은 엄숙히 자문자답해 본다. 과연 이것이 선거인가?고. (중략)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3.15 선거를 몸소 겪고 이래도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희망을 걸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믿는다. 사는 길은 오직 호헌 구국의 대의를 내걸고 전체 국민과 더불어 투쟁하는 국민운동의 전개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을 자각한다.”

전 국민의 궐기를 촉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석채는 이날 일부러 마감 5분을 남기고 주필 유봉영에게 원고를 넘겼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수정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유봉영은 “내용을 검토할 시간이 없으니 제목만 고쳐 내보내자”고 했다. 최석채가 붙인 원래 제목은 <호헌 국민운동으로 국민들은 총궐기하라>였다.

이 글을 쓰면서 최석채는 구속을 각오했다. 실제로 경무대에서는 그를 구속하기 위해 대공 검사, 치안국장, CIC(미군 정보기관) 대장 등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정부 공보실장 최치환이 “최석채를 구속하면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격”이라며 “구속을 하더라도 민심이 수습된 뒤에 하자”고 만류했다. AP, UPI 통신 등 외신기자들은 그가 구속될 것을 확신하고 취재하기 위해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최석채는 사설을 넘긴 후 잠적해 버렸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4월 19일 군중 속에서였다. 경제부 기자 방우영이 계엄군 탱크를 에워싼 군중 속에서 우연히 최석채를 발견했다. “최 선생, 신문사에서 걱정하는데 어찌 된 일이냐”며 반갑게 손을 잡자 최석채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민중이 승리했다”고 기뻐했다. 방우영은 그때 그 모습에서 “행동하는 지성인의 면모를 발견했다”고 회고했다.

4.19 후 최석채는 진보 계열의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조선일보를 떠났다. 그러나 낙선이었다. 최석채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1961년 1월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군사정권의 압력으로 국장에서 물러난 그는 선우휘와 함께 1년가량 사원명부에 없는 유령 논설위원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일영이 두 사람에게 “약속 없으면 점심이나 하러 갑시다”라고 했다. 방일영이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남산 중앙정보부장실이었다. 정보부장과 한담을 나누다 나오면서 방일영은 “이것으로 두 분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내일부터는 기명으로 글을 쓰셔도 좋습니다”라고 했다.

최석채는 논설위원을 거쳐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 주필을 지내며 양호민, 송건호, 이어령, 김성두, 박노경 등을 속속 영입했다. 그는 ‘붓의 주인(주필)’답게 책임의식이 강했다. 정치적으로 미묘한 사안이면 “그래, 내가 쓰지”라고 사설 쓰는 일을 떠안았다.

“난 여러 번 불려가 보았으니 저들의 유도심문에 말려들지 않을 자신이 있어. 또 이전의 청년 운동과 경찰 경력 때문에 최소한 빨갱이로는 몰리지 않을 것 아닌가?”

최석채는 1917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경북 김천에서 성장해 일본 주오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광복 후 대구에서 부녀일보사 편집국장을 하다 청년단체에서 활동했고, 1949년 경찰에 들어가 바로 경감 계급을 달았다. 경찰 간부가 부족할 때 법을 공부하고 청년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1952년까지 경북 문경-성주-영주에서 경찰서장을 지냈다.

성주 경찰서장 시절, 그는 밤중에 불쑥 파출소에 나타나 소장이 이유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으면 파면해 버렸다. 파출소는 사회 안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말초 거점인데, 한 순간도 그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문경서장 시절에는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와 문초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풀어주기도 했다. 최석채는 사찰계 계장과 주임을 불러 “불쌍한 사람들 아니냐. 우리가 달아나 보호하지 못하는 바람에 살아남기 위해 본의 아니게 부역했을 뿐인데”라면서 선처를 지시했다. 문경을 떠날 때 그곳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그는 극구 말렸다. 대신 비문 내용을 액자로 받아 집에 두고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의 말도 글처럼 꼿꼿했다. 1964년 6월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서울 일원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 신문사 사장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최석채는 편집인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다고 여긴 공보실장 이후락이 최석채에게 “한 말씀 하시라”고 권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최석채에게 집중됐다. 그는 20분가량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일제 식민지로 일본 사람들한테 그렇게 짓밟히고 한일 수교를 한다는데 이 정도의 소란도 없다면 우리 국민은 죽은 국민이다. 정부가 일본과 협상을 하는 데도 이건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될 수 있다. 데모를 적대시하지 말고 언론이 선동한다는 편견도 버려야 한다”는 요지였다.

그날 저녁 청와대 비서관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대통령이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신다”며 최석채를 차에 태웠다. 모임이 끝나자 박정희가 “면종복배하는 놈보다 낫지. 내 앞에서 그만한 말을 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며 그를 다시 찾았다는 것이다. 그날 새벽 1시까지 최석채는 박정희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후로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박정희와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최석채는 동갑내기 박정희에게 무슨 말이든 서슴지 않았다.

그는 정부가 언론을 탄압할 때 좌시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차관 도입 내막을 추적한 기사가 실린 《신동아》 1968년 12월호 때문에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가 신문사를 떠나고 기자들이 구속됐을 때였다. 최석채는 <신문은 편집인의 손에서 떠났다>라는 글을 기자협회보에 싣고 언론이 권력과 비굴하게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당당하게 싸울 것을 촉구했다.

“언론인으로서 징역살이하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할 말을 못 하고 보도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다. 외부와의 투쟁은 이면교섭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법원으로 가서 당당히 싸워야 한다. 유죄가 되면 언론자유는 그만큼 좁아지고 무죄가 되면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다.” (기자협회보 1968년 12월 27일자)

1971년 12월 최석채는 10여 년 간 몸담았던 조선일보를 떠났다. 정부에서 국가보위법을 지지하는 사설을 쓰라고 계속 압력을 넣자 그는 “신문사를 살리려면 내가 나가는 수밖에 없다”며 사표를 내고 떠나갔다. 훗날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조선일보 기자가 된 아들 최장원에게 “언론인은 투사도 혁명가도 아니다. 현실에 발을 디딘 채 일정한 선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그 선을 지키기 위해 선을 넘어야 할 때가 잇다. 내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낸 게 바로 그 경우였다”고 말했다.

그 후 최석채는 문화방송-경항신문 회장,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낸 뒤, 대구의 매일신문 명예회장을 하며 1981년 4월부터 1987년까지 만 6년 동안 이 신문에 <몽향 칼럼>을 썼다. 그는 1991년 사망할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2000년 5월 IPI(국제언론인협회)는 그의 정론직필과 용기를 기려 최석채에게 20세기 ‘언론 자유 영웅(Press Freedom Hero)’ 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IPI 창립 50주년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언론자유 수호에 기여한 20세기 언론인 50명을 선정하면서 한국 언론인으로는 유일하게 최석채를 뽑은 것이다. 최석채는 평소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권력자는 은퇴 후 화려한 영광의 기억이 남고, 경제인은 은행구좌에 재산이 남지만, 신문인은 기사 스크랩과 자존심 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 언론인이 자존심을 버리면 언론에 대한 사명감도 없어지고, 언론의 권위도 떨어지는 것이다.”

“욕 많이 먹은 언론인으론 기네스북 감”
선우휘 192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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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8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이 실종됐다. 일본 경찰의 수사가 미궁을 헤매고 있던 8월 13일,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모습을 드러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중앙정보부가 납치해 데려왔다는 의혹이 무성했지만 수사는 겉돌았고,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 거론조차 하기 힘든 때였다.

사건 발생 한 달째인 9월 7일 새벽 주필 선우휘가 편집국에 나타났다. 원고를 손에 들고 나타난 그는 야근자들을 불러 모으더니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굽히지 않겠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윤전기를 세우고 사설을 갈아 끼우라는 지시였고, 아무도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언론사에 기록된 1973년 9월 7일자 사설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이렇게 신문 지면에 실렸다.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 무엇이 그토록 알고 싶고, 무엇을 그토록 말하고 싶은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한마디로 김대중 사건이라고 하겠는데, 지금은 사건을 수사 중이니 수사결과가 밝혀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면 더 이상 다그칠 수도 없으니 더욱 답답하다. (중략) 그러나 무엇보다 더 유의해야 할 것은 설혹 우방과 얽힌 문제가 결정적인 불행을 초래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이번 사건이 불투명하게 처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국민은 당국에 사건의 조속하고 떳떳한 해결을 촉구할 의무가 있다.”

날이 밝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중앙정보부가 총동원돼 신문 회수 작업에 들어갔지만, 신문은 이미 독자들 손에 들어간 뒤였다. 비상연락을 받고 신문사로 달려온 사장 방우영의 책상 위엔 봉투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일생일대의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국가의 체면과 조선일보의 명예를 위하여 독단전행한 소생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라는 글귀와 함께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선우휘는 곧장 안양 지국장 집으로 피신했고, 신문사는 중앙정보부와 열흘에 걸친 교섭 끝에 겨우 사태를 무마할 수 있었다. 선우휘의 행동은 자신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신문사의 명운까지 건 모험이었다.

박정희는 그러나 이 일로 선우휘를 높게 평가했다. 선우휘를 만난 박정희는 “내가 계속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치가 안정되면 그만둘 겁니다. 들어와서 좀 도와주십시오”라며 감사원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박정희의 끈질긴 권유에 선우휘는 “들에 핀 꽃이 어여쁘다 해서 집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답겠느냐”는 일본의 단시를 인용하며 사양했다.

선우휘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것은 1946년 3월이었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경성사범 본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그는 동년배인 신상초(9~11대 국회의원), 지명관(한림대 교수) 등과 함께 ‘정주의 수재’로 불렸다.

광복 후 선우휘는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 환멸을 느꼈고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러고는 경성사범 입학 때 보증을 서 줬던 고향 어른 방응모를 찾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리기 위해 신문기자가 됐지만, 그의 진심은 잘 먹혀들지 않았다. 학교 동창이나 지인들에게 북쪽 실정을 알리려고 하면 “혁명이 착착 진행 중인 이북을 등지고 무엇 때문에 양키들의 식민지로 왔나?”라는 냉소를 보냈다. 남한 지식인 대부분이 좌경화해 있는 것 같았고, ‘북한 실정을 체험하고 오지 않았다면 나도 좌익이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 사회에 실망할 때도 북한과 비교해 생각할 수 있었기에 그는 일생 반공주의를 견지할 수 있었다.

선우휘는 해방 공간에서 민족지도자들을 가까이에서 취재하며 그들에게도 실망을 느껴 이후 어떤 정당이나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소설가 김말봉이 ‘공창제 폐지’ 운동을 할 때 함께 유곽 앞에 가서 시위하다 몽둥이를 든 깡패들에게 쫓겨난 게 거의 유일한 직접적인 사회 참여 경험이었다.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던 그는 입사 1년이 안 돼 미국 유학을 간다며 사표를 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밀항하려던 계획은 실패했고, 경성사범 동기인 시인 조병화의 소개로 인천중학교 교사가 됐다가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후 정훈 장교로 군에 들어갔다. 남북한 무력 충돌이 있으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군대에 들어가 젊음을 불태우려는 생각에서였다.

6.25를 겪으며 국방부 정훈국 평양분실장을 지낸 선우휘는 1955년 문단에 데뷔,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 방황하는 젊은이를 그린 단편 소설 ‘불꽃’으로 1957년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육군본부는 그에게 “군인이라면 다 무식한 줄로만 아는 일반의 인식을 깨고 군인의 위상을 드높였다”며 표창장을 주었다.

선우휘가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다시 입사한 것은 5.16 하루 전날인 1961년 5월 15일이었다. 1957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친 다음이었다. 그는 출근길에 군사 쿠데타 소식을 듣고는 곧장 육군본부로 가 함께 지냈던 정훈장교들에게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냐?”고 소리쳤다. ‘군인은 절대 정치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줄기차게 사설을 써 오던 그였다. 이 일로 체포령이 떨어져 보름쯤 숨어 지내다 신문사에 돌아온 뒤 1년간 무기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었다.

1963년과 1968년 그리고 1971년 세 차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선우휘는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총대’를 멘 구원투수였다. 1963년 발행인이 된 상무 방우영이 물갈이 인사로 회사를 대대적으로 구조개편하기 위해 택한 파트너가 선우휘였다. 방우영은 그가 사심 없는 사람임을 진작 알아봤다. 방우영이 편집국장을 맡아 달라고 하자 선우휘는 “방 상무가 정도에서 벗어나면 언제든 그만 두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1964년 8월 공화당이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후 각 언론사들이 윤리위 소집에 대한 찬반 입장을 밝혀야 할 때였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뻔했지만, 보복조치 때문에 쉽게 신문사의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장 표명 날짜가 나흘 앞으로 다가온 8월 24일 늦은 밤, 국장 선우휘가 편집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책상정리를 하고 짐을 싼 후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나갔다. 구구한 설명 없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 준 행동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지방부장 목사균은 곧장 편집국 간부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25일 새벽 통금이 풀리자마자 간부 11명이 회사 앞으로 속속 집결했다.

대표 방일영의 집을 찾아간 이들은 “신문사의 문을 열고 죽는 수가 있고, 문을 닫고 사는 수가 있다”며 윤리위 소집에 반대할 것을 호소했고 받아들여졌다. 전무 방우영이 신문발행인협회에 나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다음날 선우휘는 편집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반대 의사를 밝힌 곳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신문(대구)의 4개사뿐이었다.

선우휘는 최석채의 뒤를 이어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주필을 역임했다. 그는 “사시에 어긋날 때 그 점만 지적했을 뿐, 논설위원들의 문장에 손을 댄 적은 별로 없다”고 한다. 문장은 쓰는 사람 고유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공격적이다 싶을 때면 필자와 상의해 표현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수위 조절을 했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선우휘와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논설위원들이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며 별 무리 없이 맞춰 갔다. 1960년대 논객들이 격동의 시대를 호흡하며 역사의 급류에 뛰어들었다면, 1970년대 논설위원들은 각기 전문 분야를 가지고 제 목소리를 냈다. 선우휘는 이들을 존중했고, “그건 당신이 전문가지. 내가 뭘 아나?”라면서 자율권을 줬다.

그는 대신 자신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시론’에서 분명한 목소리를 냈고, 1980년 논설고문이 된 후 1986년 퇴임할 때까지 ‘선우휘 칼럼’을 썼다. 작가적 감성이 살아 있는 선우휘의 글은 특히 중산층 지식인 독자들의 공감을 샀다.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전달하지 않는 직설적인 글로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부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하다가도 잘한 일이라 생각되면 눈치 보지 않고 칭찬도 했다. 그러니 이쪽도 저쪽도 마뜩찮게 생각해 선우휘 스스로 ‘욕 많이 먹은 언론인으로는 기네스북 감’이라고 자평할 정도였다. 선우휘의 글은 말년에 가까워질수록 수필을 쓰듯 자기 고백적으로 바뀌어갔다. 정치나 사회 현상에 대한 분노도 많이 사그라졌는데, “따뜻하다”며 그런 글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쉬운 글이 좋은 글’이란 신념을 가졌던 그는 젠체하지 않는 쉬운 글로 독자들과 소통했다. 그는 기자의 생명은 문장에 있다고 생각했고, 편집국장 시절 기자들에게 “연륜만 쌓는다고 노련한 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문체를 확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소설가가 되기 전 선우휘가 문장 훈련을 시작한 곳이 조선일보였다. 1946년 조선일보에 처음 입사했을 때 그는 시간만 나면 신문, 잡지는 물론 소설, 수필, 시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좋은 낱말 문장 하나라도 더 내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공책에 적어 놓고 익히기도 했다. 일제 때 교육 받은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말로 글 쓰는 것을 어려워하던 때였다.

이때 기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사람이 사회부장 홍종인이었다. 부장이 펄럭펄럭 자신의 원고를 넘기다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 때는 가슴이 철렁했고, 붉은 색연필로 벅벅 그을 때는 가슴이 갈고리로 긁히는 듯했다고 선우휘는 훗날 회고했다. “부장님, 너무하지 않습니까?”라는 부원들의 불평에 “지금 몰라서 그렇지, 두고 봐. 10년 후면 나한테 고마워할 걸”이라고 했던 홍종인의 말대로 선우휘는 10여 년 후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이름을 얻었다. 후배 기자들에게 선우휘는 “그때에 비하면 요즘 기자들은 문장에 대한 관심이 없어. 자기가 쓴 문장에 늘어붙어 고치고 또 고치는 노력과 끈기가 있어야 하는데”라고 말하곤 했다.

선우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허름한 양복에 똑같은 넥타이만 매는 그를 보고 홍종인이 “타이 좀 바꿔 매라”고 하면 “선생님, 원래 타이라는 것은 댕기와 같이 가운데 늘어뜨려 중심 역할만 하면 되는 물건 아닙니까”라고 응수했다. 편집국장 시절에도 자주 자리를 비웠고,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져 있을 때도 있었다.

신문사에 있으면서도 그는 천생 작가였다. 술을 한번 마시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끝장을 봤는데, “한 달에 한 번쯤은 통음을 해야 머릿속 찌꺼기를 씻어내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만취해 들어온 후 물건을 부수는 일도 많았다. “지금 국장이 술에 취해 지프를 부수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수위가 사장에게 달려가 보고하면 방우영은 “그냥 둬. 쇳덩어리 부숴 봤자 별수 있어? 유리창 몇 개 깨지고 말겠지”라고 했다.

호주머니에 만 원짜리 몇 장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정도로 선우휘는 돈 개념이 없었다. 정치부 차장으로 있던 동생 선우연에게 “야, 돈 좀 주라”고 후배 기자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기도 했다. 선우연은 정치2부장을 하다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거쳐 국회의원이 됐다. 두 사람의 형제애는 유별났다. 선우휘가 정훈장교 때 선우연이 부관이었는데, 선우휘는 “독자인 아버지 밑에 아들이라고 우리 둘뿐인데 한꺼번에 죽으면 혈통이 끊어진다”며 동생을 한 번도 같은 차에 태우지 않았다. 평생 형과 비교당해야 했던 선우연은 조선일보 사보를 통해 “소설 속에서도 형은 미화하고 동생은 못난이로 만드느냐?”고 형 선우휘에게 익살 섞인 항의를 하기도 했다.

선우휘는 함석헌, 안병욱, 지명관 등 이북 출신 월남 인사들을 조선일보 지면에 등장시켰다. 1963년 7월 민정이양을 둘러싸고 논란이 거듭될 때 박정희와 정치인, 지식인, 군인, 학생, 민중 등에게 각자 제자리를 지킬 것을 호소하는 함석헌의 글 ‘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가 7회에 걸쳐 1면에 연재됐다. 함석헌은 ‘박정희님에게’ 편에서 “첫째, 군사 쿠데타를 한 것이 잘못”이라고 적시하면서 조목조목 군정의 잘못을 지적한 후 이제 남은 길은 혁명 공약을 준수하는 것이며, 그 다음 일은 당신이 걱정하지 말라고 엄중히 충고했다. 이 글에 흥분한 중앙정보부는 ‘국난타개책’이란 이름으로 서울대학 교수가 쓴 반박문을 같은 분량으로 실으라고 요구했다. 반박문이 나간 후 다시 함석헌의 글이 실렸다.

1973년부터 15년 동안 한국 군부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주화 운동 소식이 일본 잡지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란 칼럼으로 연재됐다. 필자는 ‘T.K생’이란 익명이었다. 1980년대 초반 안기부는 선우휘를 불러 “당신은 일본통이니 T.K생이 누군지 알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선우휘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 아니겠느냐?”며 둘러댔다. 2003년이 되어서야 한림대 교수 지명관이 “T.K생은 나였다”면서 “나를 일본 잡지에 소개한 사람은 선우휘”라고 밝혔다.

1966년 일본 도쿄대 신문대학원으로 연수를 간 선우휘는 시바 료타로등 일본 작가, 지식인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세카이》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를 알게 됐다. 1972년 지명관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선우휘는 그를 료스케에게 소개시켰고, 지명관은 도쿄여대 교수로 있으면서 이 칼럼을 연재했다. 자신이 다리를 놓아 10여 년 간 계속된 칼럼이지만 선우휘는 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야 어떻든 외국에 살면서 한국을 비난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선우휘는 1986년 뇌일혈로 사망하기 직전 일본에 들렀을 때 지명관과 이틀 밤을 함께 지내며 “당신 왜 그렇게 살아, 왜 그렇게 살아”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선우휘의 아들 선우정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동료 기자와 결혼했다.

이청준 소설 속의 ‘이정태 기자’
이규태 1933~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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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는 입사 때부터 엉뚱한 기자였다. 1959년 수습 2기로 입사한 그는 영어 면접 때 서툰 영어에서 ‘서(sir)’란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며 논설위원 부완혁에게 “하우스보이 출신 같은 영어”라고 심한 말을 듣자 재떨이로 책상을 치며 항의했다. 그런데 합격통지서가 왔다. 상투적인 주제로 논문을 쓰라는데 반발해 논문 아닌 반박문을 쓴 작문 시험에서 그의 글재주와 배짱이 돋보였다는 것이다.

기자가 된 이규태는 종래의 취재 관행에 저항감을 느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야 하는 사회부에서 그는 자주 “못 쓰겠습니다”라고 항명했다. 피살자의 피 묻은 주머니 안에서 신분증을 빼내오고도, 남편 외도 때문에 자살한 고위관리의 부인 이야기를 캐내고도 못 쓰겠다고 했다. 이 때문에 “기자 그만 둬”라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 독자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한 사람의 사생활과 인격을 짓밟아도 되는지 늘 의문이었다.

그러고는 ‘엉뚱한 것’을 기사라고 우겼다. 입사 직후 사회부 기자로 뛸 때 세 살짜리 아기가 전차 밑에 깔렸는데 찰과상 하나 입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으로 간 이규태는 자로 전차 바닥 높이와 아기가 엎드렸을 때의 폭을 잰 후 신나게 기사를 써 내려갔다. 부장은 그러나 “죽었어도 1단이 될까 모르는데 너 장난 하냐?”면서 원고를 쫙쫙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전차에 깔리면 죽는 게 당연한데, 죽지 않았으니 기사가 되지 않느냐?”고 항변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언제, 누가, 어디서, 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육하원칙에 따라 취재해 쓰는 기사가 ‘호두 껍데기’라면 그 안의 인간적 맥락을 찾아 의미를 캐내는 게 ‘호두 알맹이’라고 생각했고, 호두 알맹이를 많이 발굴해 내야 질 좋은 지면이 된다고 믿었다. 이규태가 찾아낸 대표적인 호두 알맹이 <소록도의 반란>은 작가 이청준에 의해 소설로 바뀌었다.

1960년대 초부터 소록도의 삶을 취재해 <유배지에 핀 마돈나의 미소>(조선일보 1963년 11월 10일) 등 기사로 써 온 그는 나환자들에게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오마도 간척사업’을 벌이는 소록도 병원 원장 조창원을 만났다. 돌을 깨 등짐으로 나른 후 바다에 던지는 무모한 작업을 지휘하던 조창원의 열정에 이끌려 끈질기게 취재한 이규태는 이 이야기를 《사상계》 1966년 10월호에 실었다. 조창원이란 인물에 매몰되는 대신 그를 매개로 나환자들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소록도의 역사,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의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친 이 논픽션은 이청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10년 후인 1976년 《당신들의 천국》이란 소설로 나타났다. “이규태님은 미숙한 문학청년에게 야심적인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소설 곳곳에서 그의 빼어난 취재의 눈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이청준은 책 서문에서 헌사를 바쳤다.

이 소설에서 이규태는 취재를 위해 일꾼들 틈에 몰래 끼어든 “땅딸막한 키에 가슴이 제법 넓게 벌어진 당당한 체구, 선 굵은 검은 테 안경알 속에서 양순한 듯 하면서도 만만찮은 시선”의 ‘C일보 이정태 기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소록도의 비밀’은 이정태 기자에 의해 한꺼풀씩 벗겨진다.

1968년 연재한 <개화(開化) 백경(百景)>이 ‘이규태 한국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장르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남다른 시선으로 사물의 이면을 끈질기게 파헤치는 그의 통찰력 때문이었다. 1968년 3월 21일자 1면에 ‘쇄국을 뚫은 지 백년…겨레의 애환을 엮는 특별연재’라는 사고와 함께 시작된 <개화 백경>은 원래 박종화, 이은상 등 원로들이 쓸 계획이었는데 모두 “자료가 없어 못 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바람에 그가 떠맡았다. “독자와의 약속은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 딱 7회만 써 달라”는 사장 방우영의 부탁으로 시작했던 게 60회 연재로 이어졌고, 이걸 다시 증보해 책으로 냈다. 이 책이 영어(《Transformation of Korea》), 중국어(《韓國人的意識形態》)로 번역돼 전 세계 주요 대학과 연구소에 소장되면서 한국을 알리는 창구 역할을 했다.

<개화 백경>을 쓰면서 이규태는 헌책방에 파묻혔다. 거기에서 찾아낸 각종 문헌과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발굴한 개화기 풍경은 “매우 이색적이고 재미있다”는 평과 함께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그 길로 그는 미답의 땅에 들어섰다. 그가 끈질기게 추구한 의문은 ‘한국인은 누구인가?’였다.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의 인맥> <한국인의 의식구조>등 신문 연재물과 책이 연이어 나왔다.

입사하자마자 월급으로 벽돌을 사 모아 집을 지었다는 ‘전설 같은 사실’이 보여주듯 이규태는 끈질긴 사람이었다. 테니스를 처음 배울 때, 20일이 넘도록 네트 너머로 공을 넘기지 못하는 그를 보고 코치가 “당신같이 못 치는 사람도 처음 보고, 당신같이 끈질긴 사람도 처음 본다”고 했다. 테니스는 그의 평생 운동이 됐다. 자신만의 분야가 있는 것을 이상적인 기자상으로 생각했던 그는 그 끈질김으로 한 우물을 팠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가 한국학에 빠져든 것도 특이하다. 그 씨앗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지》로 유명한 작가 펄 벅이 한국을 찾았을 때 2년차 문화부 기자였던 이규태는 펄 벅과 함께 지방을 여행했다. 그런데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던 중 펄 벅이 갑자기 이규태의 무릎을 쳤다. 지게를 진 채 소달구지를 끄는 농부를 가리키더니 “미국인이라면 달구지에 올라탔을 텐데. 소의 짐까지 덜어주려는 저 마음, 내가 보고 싶었던 게 바로 저거야!”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아. 저렇게 볼 수도 있구나’라는 충격은 이규태의 기자 생활을 바꿔 놓았다. 그때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흐르는 것은 무얼까?’를 묻고 탐구하게 만들었다. <개화 백경>을 쓰면서 그는 ‘잊혀져가는 우리 것을 조명하면서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빚어진 우리 문화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1983년 이규태는 사장의 지시를 받았다. 원고지 6~7장 안에 동서고금을 오가는 이야기로 시사문제를 풀어내는 칼럼을 쓰라는 것이었다. 사장 방우영은 “쉽지만 알맹이 정보는 꽉 차게 써”라고 주문하면서 <이규태 코너>라고 문패도 달아 줬다. 매일 발생하는 시사 뉴스를 들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역사 특파원’으로 발령받은 셈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기상 시간도 달라졌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서재를 뒤진 후 필요한 자료를 챙겨들고 출근했다. 매달 수백만원어치의 책과 자료를 사들인 그의 서재에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고서부터 외국 신문 잡지까지 쌓여 있지만 그 자료 더미에서 필요한 내용을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게 큰일이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그는 녹색은 자연, 빨강은 인생 등 다섯 가지 색깔로 크게 분류하고, 그 밑에 또 수백 가지로 분류한 ‘이규태식 분류법’을 개발해 냈다. 그 분류법으로 ‘안락사’라면 스파르타와 로마제국, 여진족의 안락사 풍습까지 찾아내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혁신계 인사로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의 딸로,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출신인 아내의 내조도 컸다.

풍부한 데이터베이스에 감칠맛 나는 글 솜씨가 결합된 데다 우리나라와 세계 구석구석을 발로 누빈 그의 체취가 배어 있는 칼럼은 인간적인 훈기를 느끼게 했다. 독자들은 “신문 지면에서 이규태 코너만 촉촉이 젖어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규태는 전북 장수군의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성장해 “처음에는 그게 열등감이었지만, 전통적인 생활을 오래 경험한 데 대해 차츰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사회부 기자 시절 그는 두메산골과 어촌, 낙도 등 궁벽한 곳을 찾아다니며 원형에 가까운 한국인의 삶을 취재했고, 그게 글의 원천이 됐다.

1970년 컬러 지면을 도입한 조선일보가 세계로 눈을 돌릴 때 그는 등반대를 따라 히말라야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엔 혜초의 발자취를 찾아 <신(新)왕오천축국전>을 쓰면서 ‘컬러 시대’의 서막을 장식했다. 그후 <기독교 성지순례> <서역 3만리> 등을 다녀왔다.

그의 첫 해외 취재는 1965년 조선일보 첫 월남 특파원으로 나갈 때였다. 그곳에서 이규태는 베트남전쟁의 전황뿐 아니라 어린이, 연인, 상인, 스님, 예술가 등 전쟁이라는 상황에 놓인 각양각색 사람들의 삶에 확대경을 들이댔다. 세계의 골목을 돌아다니니 우리 것이 더 잘 보이고, 다른 문화와의 연결점도 보였다. 이렇게 세상을 누비며 사람과 역사의 체취를 맡았기에 그는 매일 책더미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젖은 글’을 쓸 수 있었다. 뭐든 한번 시작하면 그만두는 법을 모르는 그에 대해 작가 최일남은 “그 습벽 때문에 글쓰기를 멈추지 못할 것이라 나는 장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4년 8월 말, 이규태는 조선일보를 퇴임했다. 1959년 3월 1일 입사한 이래 45년 6개월 만이다. 그러나 펜을 놓지는 않았다. 1983년 3월 1일 시작한 <이규태 코너>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조선일보의 ‘그 자리’를 지켰다.

외국 기자들도 반한 학구파 국제 신사
최병우 1924~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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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역사적 현장을 취재하는 한국 기자는 2명뿐이었다. 그 중 한 명인 조선일보 외신부장 최병우가 탄식했다.

“아, 만사휴의! 백만의 동포가 흘린 피의 값을 어디서 찾아야 옳단 말인가.”

그가 쓴 휴전협정 조인식 기사의 제목은 <기이한 전투의 정지 – 당사국 제쳐놓은 결정서로 종막>이었다.

“백주몽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너무나 우리에게는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 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하여도 약 100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을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조선일보 1953년 7월 29일자)

그의 펜은 조인식의 기이한 분위기와 그것이 예고하는 듯한 민족의 험난한 앞길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갔다.

“27일 상오 10시 정각, 동편 입구로부터 유엔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 이하 대표 4명이 입장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편 입구로부터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 이하가 들어와 착석하였다. 악수도 없고 목례도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종막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중략)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어떠한 극적 요소도 없고 강화에서 예기할 수 있는 화해의 정신도 엿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었다. 각기 자기 측 취미에 맞추어 가죽으로 장정하고 금자로 표제를 박은 협정부도 각 3권이 퍽 크게 보인다. 그 속에는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를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위의 글)

최병우는 한국은행에 근무하다 1952년 외신부 차장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휴전협정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과 학구적이고 진지한 자세로 단번에 언론계의 주목을 끌었다.

일제 강점기 최병우는 경기중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치고등학교를 거쳐 도호쿠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하자마자 일본군에 징병됐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그는 미 군정청 외무처에 다니다가 도쿄출장소 파견 근무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한국은행 부총재 장기영을 만나 한국은행 도쿄지점으로 옮겼다. 1951년 한국으로 돌아와 1952년 4월 장기영이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할 때 조선일보 기자가 됐다.

정전회담 취재를 위해 판문점에 드나들던 기자단의 버스 안에서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최병우 기자회견’이었다. 우리나라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 기자들이 최병우에게 자꾸 질문을 던졌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설명하다 결국에는 버스 한복판으로 떠밀려 나가야 했다. 한국 기자들도 질문이 많았다. 미군 공보장교의 영어 브리핑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평화신문 기자였던 조세형은 “미군 발표를 눈치껏 짐작하곤 했지만 그걸 갖고 기사를 쓰기란 어림도 없었다. ‘최병우 회견’에 한국 기자들이 참여하고 나서부터 국내 신문의 판문점 기사는 한결 정확해졌다”고 말했다. 최병우는 미 군정청에서 일할 때 영어를 마스터해, 1년이 안 돼 미국인을 제치고 과장으로 승진할 정도였다.

기자 생활이 짧았지만 최병우는 기사 작성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언론인 조풍연은 그에 대해 “기사에서 리드(첫 문장)를 잘 뽑아낼 줄 아는 흔치 않은 기자였다”고 평했다.

전쟁 중 최병우는 “외국인 기자는 생명을 걸고 최전선까지 가 있는데 자기 나라 전쟁에 한국인 기자가 없다”면서 종군기자를 자원했다. 전선에 왔다 갔다 하며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은 다반사였다.

판문점 취재 때면 새벽 4시에 출입기자들의 집결지인 유엔군 종군기자 숙소에 달려갔다. 손에는 무거운 타이프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돈과 시간이 모자라 식사를 건너뛰는 일이 많았다. 저녁이면 몇 시간씩 차에 흔들리며 신문사로 돌아와 기사를 정리했다.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가서도 온통 일 생각에 빠져 있는 듯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최병우의 부인 김남희는 “그가 제일 고생한 것은 판문점 회담 때”라며 “당시 모습을 눈물겹게 회상한다”고 말했다.

최병우는 많은 외국 기자와 외교관들을 친구로 사귀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붙임성이 좋았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티켓이나 교양에서도 노련한 외국 기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는 공부하는 기자였다. 밤늦게 귀가해도 반드시 책을 읽었다. 틈만 나면 헌책방을 찾아다녔고,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전차비도 남기지 않고 주머니를 톡톡 털어서 샀다. 그의 부인은 “책은 그의 종교”였다고 했다.

어느 날 최병우는 판문점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 박권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언론계에도 클럽이 하나 있어야겠어. 뜻 맞는 사람끼리 만나 정담을 나누고 토론도 하고,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 늦어지면 잠도 자고. 그럼으로써 국가 민족의 갈 길을 모색하고 이를 제시할 수 있고.”

‘클럽’이란 영국에서 16세기 초부터 형성된 정계, 재계, 언론계, 관계 등 상류사회 조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박권상이 보기에 최병우는 너무 앞서가고 있는 듯했다.

“최 형, 꿈같은 소리구만.”

“이봐, 큰일은 꿈부터 시작하는 거야. 우선 꿈부터 꾸어야지.”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57년 1월 11일 최병우의 꿈은 이뤄졌다. 젊은 기자들 사이 친목과 연구를 목적으로 한 관훈클럽이 창립된 것이다. 서울 관훈동 한 하숙집에서 최병우와 박권상을 포함한 젊은 기자 14명이 모여 조촐하게 출발했지만 그 역할은 컸다. 창립 첫해에 ‘신문의 날’과 ‘신문윤리강령’을 제정했다. 오늘날 관훈클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통 있는 언론단체로서 중견 언론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1953년 12월 31일 조선일보 송년회가 끝나고 늦게 귀가한 최병우는 일기장에 “신년부터는 명실상부한 외신부 책임자가 되도록, 한국에 지금까지 없었던 진실한 의미의 ‘포린 에디터(foreign editor)’가 되어 보겠노라”고 적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외신 칼럼을 격일로 연재할 계획이었다. 그는 “정직하게 국제정세를 국민에게 알린다는 것은 신문인의 의무이고 또 모든 데마고그(선동 정치가)들과 싸우는 길도 된다”고 생각했다.

최병우의 칼럼 <외전 해제>는 1월 6일자부터 시작됐다. <미군 철수와 일본의 재무장> <닉슨 미국 대통령의 귀국연설과 인도> <열강은 독일의 통일을 원하는가> 등이었다. 국제문제에 대한 그위 안목을 보여주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이 칼럼은 17회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의욕만큼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던 듯하다. 국제문제 전문 칼럼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이른 때였는지도 모른다.

1954년 4월 최병우는 사장 장기영과 함께 조선일보를 떠났다. 그는 한국일보 외신부장을 거쳐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을 지냈다.

1958년 9월 26일 금문도 해역에서 최병우는 중국과 대만 사이 군사충돌을 취재하던 중 조난을 당해 사망했다. 35세였다. 조선일보는 그의 조난을 사설로 다뤘고, 홍종인은 조선일보에 <최 군이여 돌아오라>는 글을 실었다.

최병우의 부인 김남희는 이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 최병우의 오랜 친구이자 한국사 연구로 널리 알려진 와그너 박사와 재혼했다. 관훈클럽은 1989년 “최병우 기자의 숭고한 기자정신을 계승 확산시킨다”는 취지로 ‘최병우 기념 언론상’을 제정, 매년 국제 분야 보도에 공적이 뛰어난 기자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서울대 교수에서 해직된 사회민주주의자
양호민 191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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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민은 1965년 9월 서울대 법대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명을 냈던 대학교수단의 한명으로, 정권에 의해 ‘정치교수’로 몰려 강단에서 추방된 것이다. 몇 달 후 그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들어왔다.

그는 1960년대 초부터 외부 필자로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1964년 정부가 ‘학원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란 목적을 내세워 ‘학원보호법안’을 추진할 때 양호민은 조선일보 1면에 <소위 학원보호법안은 철회돼야>라는 제목으로 시론을 썼다. 그는 이 법이 “비민주적인 내용의 함정으로 가득한 희대의 전제주의적 악법”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1년 후 해직교수가 됐다.

서울대에서 양호민은 공산주의와는 명확히 선을 긋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학생들의 인기를 얻은 교수였다.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 사회가 건강함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려면 보통 사람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사회적 부가 공정하게 분배되며, 기회 평등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양호민은 ‘외치는 소리’가 됐다. 사회 변혁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지만 그의 뿌리는 ‘반공’이었다.

양호민은 1943년 일본 주오대 법학과 유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는 대신 탄광으로 가서 광복 때까지 강제노동을 했다. 탄광에서 만난 대학생들과 밤마다 좌익서적을 읽으며 토론을 벌였다. 그의 사상적 기반이 형성된 시기였다. 일본어가 강요되던 시절에 우리말을 잊지 않으려 시도 열심히 읽었다. 한정판으로 나온 백석의 시집 《사슴》을 못 구했을 뿐 일제 강점기 시집을 거의 빼놓지 않고 모았다.

그러는 동안 광복이 됐다.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그곳에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의 체제가 암흑천지라는 사실에 절망한 양호민은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 남쪽으로 온 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는데 6.25가 터졌고, 만 31세에 입대해 전쟁을 치렀다. 그는 1954년 대구대 정치학과 교수가 됐고, 9년 후인 1963년 서울대로 옮겼다. 1960~64년에는 《사상계》 주간도 겸임했다.

1919년생인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를 읽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고 한다. 친척이 평양에서 신문사 지사장을 하고 있어 신문에 일찍 눈을 떴다. 조선일보 입사 당시 주필이었던 최석채와는 대구대 교수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4.19 후 진보 계열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함께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 둘 다 떨어진 경험도 있었다. 정치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돈이라는 사실을 실감한 두 사람은 “자식들은 절대 정치 못 하게 하자”고 다짐했다. 최석채에 이어 주필이 된 선우휘와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정치학자로 국제문제에 밝았던 양호민은 우리 정치현실을 외국에 빗대 우회적으로 글을 쓰곤 했다. 어느 날 중정 요원이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조선일보가 왜 그러는지(외국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우리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외국의 시사주간지와 외교군사 전문지까지 훑고 외신부 텔렉스까지 참조하면서 국제문제를 좇았다. 영어, 일어, 불어, 독어, 중국어를 읽을 수 있어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많았다. 이 때문에 양호민의 국제문제 해설은 무게와 권위가 있었다.

1971년 미국이 중국에 탁구 선수단을 보내 ‘핑퐁 외교’로 관계 개선을 시작했다. 그는 이를 통해 달라질 주변 강대국 사이 역학관계를 <오늘의 국제문제 – 세계는 달라지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8월 24일자부터 5회에 걸쳐 파헤쳤다. 그 해 11월 <아시아의 표정 – 홍콩, 대북, 동경에서 본 중공>을 연재하면서는 “중공의 공업화가 일단락되면 모택동 사상의 유지는 어려워지고 수정주의로의 방향전환이 불가피 할 것”이라고 중국의 앞날을 진단했다.

사설을 쓸 때 양호민의 원고지는 언제나 깨끗했다. 일단 생각이 정리되면 막히는 법 없이 쭉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그가 민감한 정치관계 사설을 쓸 때도 주필 최석채나 선우휘 모두 거의 손대지 않고 내보냈다. 양호민이 오히려 불안해 “이거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으면 표현만 조금 고치는 정도였다. 논설위원들 대부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강하게 써 봤자 검열 때문에 판까지 짜놓고 못 내보낼 게 뻔했다. 선우휘는 “죽을 각오로 써도 신문에 실리지 않으면 무슨 언론 자유란 말인가?”라고 말하곤 했다.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였던 양호민은 1972년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초대 소장이 됐다.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남북관계에 대한 희망이 고조될 때였다. 이때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김일성전집》 등 금서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정면으로 비판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있던 1965년 1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비판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산주의 이론이란 게 사이비 과학으로 위장된 하나의 신화임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과학적, 철학적 공허를 세상에 알려주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임무”라고 지적했다. 그는 광복 후 북쪽에서 체험했던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이론으로 체계화했다.

1977년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최종 확정됐다는 일본의 보도가 나왔을 때 양호민은 2월 27일자 <시론>에서 이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큰 충격을 받을 자는 우선 소련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공산당들일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 지도권이 아버지에서 그 아들에게 세습된다는 것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이론과 당 조직 원칙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일이며, 어떠한 해석으로도 이것을 합리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그를 군사정권은 위험시했다. 한때 대학 강단에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국가관 불량’이라며 대학에 압력을 넣어 양호민을 재임용하지 못하게 했다. 반공정신이 투철했던 그가 이런 취급을 당한 것도 우리 사회의 아이러니였다. 1989년 양호민은 보수 이념을 내세우는 잡지 《한국논단》의 창간에 참여해 초대 사장을 지냈고, 한림대 석좌교수로도 재직했다.

서울대 총장 된 교수 겸 논설위원
고병익 1924~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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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총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역임한 역사학자 고병익은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그의 유일한 신문사 경험이었다.

그는 독일 뮌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 교수가 된 지 얼마 안 돼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조선일보에 들어왔다. 서울대 사학과 동창인 천관우가 “역사학계의 기대주인 대단한 엘리트가 있다”며 그를 주필 홍종인에게 천거하면서였다. 대학교수가 논설위원을 겸직하는 것은 그 당시 흔한 일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며 신문에 글을 써 사회적 반향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매력이었다. 너무 바삐 돌아가는 생활 때문에 어느 게 본업인지 모를 정도로 신문사 일에 빠져드는 교수들도 있었다.

처음 조선일보에 들어섰을 때 고병익은 그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끌렸다. 논설위원들은 매일 아침 주필 방에서 잡담을 하며 커피를 마시다 그날 사설 제목과 대표집필할 사람을 정했다. 주필 홍종인은 아침 일찍 출근해 캔버스 앞에서 데생을 하다 돌아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홍종인이 박식함을 무기로 분위기를 주도하려 했지만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부완혁이나 고정훈, 천관우, 송지영 등도 이에 지지 않았다. 자웅을 가리기 어려운 기탄없는 토론이 이루어졌다. 사장이 논설위원들을 특별 대접해서인지 조선일보 건물 중 논설위원실에만 에어컨이 달려 있었는데, 여름이면 냉기와 담배 연기로 뒤범벅된 채 열띤 토론을 벌였다.

고병익은 1958년 7월 입사하자마자 전공을 살려 1면에 ‘아랍세계의 사적 배경’이란 시리즈를 연재했다. 이스라엘 독립 후 중동 분쟁이 계속되던 시점이었다. 아랍세계의 탄생,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발생, 1차 대전 후의 독립투쟁 등 8회에 걸쳐 실린 이 연재물은 중동 분쟁을 역사적으로 분석해 현재의 중동을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글이었다.

그러나 고병익은 신문사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할 수 없었다. 조간, 석간 하루에 두 번 신문을 내는데다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으니 교수로서 연구 활동을 병행할 수 없었다. 강의가 없을 때는 노상 논설위원실에 나와 있어야 했다. 자신의 공부와 강의에 모두 소홀해지겠다는 생각에 2년을 못 채우고 그만뒀는데 4.19 후 유봉영이 찾아와 다시 나와달라고 청했다. 4.19 후 고정훈, 송지영 등이 퇴사해 손이 모자라던 때였다. 그 바람에 고병익은 4.19 후 정치적 혼란과 5.16 등 격동기를 조선일보에서 맞았다.

이때 ‘일사일언’을 주로 쓰다 ‘만물상’을 전담 집필했는데 이게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주제를 정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책을 읽다가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만물상 거리’가 없을까 골똘히 생각해야 했다. 지루하지 않게 글 솜씨를 발휘하면서 정보도 담고, 따끔한 말로 공감이 가게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다. 논설위원과 교수 일을 병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린 그는 1962년 서울대 교수로 옮기면서 조선일보를 떠났다. 그러나 그 후로도 ‘아침논단’이나 ‘시론’의 외부 필자로 조선일보와 인연을 이어갔다. 고병익은 1979~80년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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